불안에 대한 위로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일까요? 불안이라는 감정의 첫 불씨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불안의 불씨는 욕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눈앞의 사탕을 너무나 원하는 사람에게 사탕을 손에 쥐고 있지 않은 상황은 불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탕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눈앞에 사탕이 있는 상황은 사탕이 없는 상황과 다를 게 없지요. 욕구에는 의식이 따릅니다. 현재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미래에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다. 이러한 의식을 우리는 기대라고 부르지요. 불안은 기대에 부정적인 의식이 첨가되면 꽃을 피웁니다.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불안하다.’라고 사유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끝에는 집착이 있습니다. 바로 소유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입니다. 불안은 소유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로부터 비롯된 불안도 있지요. 기본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불안은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욕구 외에도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 명예에 대한 욕구, 지위에 대한 욕구 등이 대표적이지요. 그러한 욕구 대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질병을 유발하는 불안을 야기합니다. 욕구를 버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욕구를 제거할 수 없다면 불안의 늪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욕구를 제거할 수는 없지만, 욕구에서 비롯되는 의식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의식은 자유의 영역이니까요. 욕구는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구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집착에서 비롯된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요? 다행히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 옛 성인이 있습니다.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는 우리에게 4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성제라 부릅니다. 사성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말합니다. 먼저 고(苦)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집(集)은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멸(滅)은 번뇌가 멸한 상태를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도(道)는 열반에 이르는 길로 팔정도의 수행법을 뜻합니다. 부처는 싫어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고통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집착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수행을 해야 하고, 그리하면 번뇌가 멸하여 해탈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궁금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괴로움, 괴로움의 쌓임, 괴로움의 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 그것이다
열반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에는 8가지 수행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불교의 바른 세계관과 지혜를 깨닫는 것이지요. 불교의 바른 지혜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연기를 의미합니다. 연기는 일체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이러한 연기적 세계관의 핵심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은 어떤 다른 현상으로 환원이 가능하다고 보아야 상호의존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A는 B로 환원 가능해야 합니다. A가 A자체로만 고정되어 있다면, A는 다른 것의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없습니다. A가 다른 어떤 현상으로 치환 가능해야 A는 어떤 현상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현상의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A가 B로 환원 가능하다면, A는 A도 아니며 B도 아닙니다. 결국 고정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안의 주체인 ‘나’는 어떨까요? 네, 맞습니다. ‘나’라는 고정적인 자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착의 주체인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집착 대상도 존재할 수 없겠지요. 집착의 주체인 고정적인 내가 없음을 깨달음을 통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볼까요?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현재는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미래에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낍니다. 이러한 사유는 내가 고정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현재 짝사랑하고 있는 내가 미래에도 고정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으므로 미래에 짝사랑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미 아시겠지만, 짝사랑하고 있는 나는 미래에도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여러 현상의 영향을 주고받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짝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집착의 주체인 고정적인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우리가 집착하는 명예도, 지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하면 눈이 밝은 사람이 단단한 재목을 구하려고 날이 선 도끼를 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큰 파초 나무가 통통하고 곧고 길고 큰 것을 보고, 곧 그 뿌리를 베고 꼭대기를 자르고, 잎사귀를 차례로 벗겨 보아도 도무지 단단한 알맹이를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가까이 보고 생각하고 분별해보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건실한 것도 없고 알맹이도 없고 단단한 것도 없다. 그것은 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가시와 같고 독기와 같아서 무상하고 고(苦)이며 공(空)이고 무아(無我)이다.
이제 집착에서 비롯된 불안의 해법이 조금 보이는 것 같나요? 상일주재의 자아가 없다는 것을 연기적 세계관을 통해 깨닫는 것. 그리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짝사랑을 하고 있는 상일주재의 내가 없다면, 짝사랑 상대를 소유하고 싶다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집착하지 않으면 얻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불안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집착에서 정녕 벗어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욕구하는 대상에 집착하는 나는 잠시 잊어보세요. 눈을 감고 나에게 집중해보세요. 고요함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몸의 변화와 의식의 흐름을 느껴보세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 의식까지도 잊어보세요. 그 잠깐의 순간에 호흡이 편안해지며, 불안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불안에 떠는 것으로 삶을 허비하지 마세요. 나의 욕구를 발판 삼아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욕구 대상에 집착하지 마세요. 타인을 욕구의 대상으로 보지 마세요. 타인을 나의 욕구의 성취를 가늠하는 척도로 삼지 마세요. 타인은 나의 원인이고 나의 결과입니다. 즉 나의 인연입니다. 그리고 타인뿐만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존재자는 나의 인연입니다. 그 인연과 이 우주를 편안하게 유영하고, 서로에게 감사하고 자비를 베풀어보세요. 그것이 우리가 삶 속에서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참고 – 한자경, 불교 철학의 전개, 예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