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재와시간 Oct 30. 2022

윤리학이 주는 위로 - 불확실로 인한 불안에 대한 위로

불안에 대한 위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예측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을 통해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계획하지요. 하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판단과 예측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지금 곧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내세에 대해서, 내가 가진 명예에 대해서, 곧 닥칠지 모르는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곤 합니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들은 아주 많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불확실한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은 불확실한 것이 맞을까요? 헬레니즘 시대의 사상가 ‘에피쿠로스’는 우리의 삶은 불확실한 것이 맞다고 봅니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원자는 자신의 운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내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봤습니다. 내적인 의지를 가진 원자는 직선 하강 운동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에 세계는 그러한 원자들이 뒤엉켜 형성됩니다.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형성된 세계는 불확실한 세계라고 본 것입니다. 즉 예측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불안감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불확실한 세계에 대해 위로받을 수는 없을까요?


  어떤 이들은 운명을 만물의 여주인이라고 불렀지만, 사려 깊은 사람은 운명을 비웃는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것은 필연에 따라 생겨나며, 어떤 것은 우연에 의해서 또 다른 것은 우리의 힘에 의해서 생겨나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려 깊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필연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우연은 유동적이며, 우리 힘에 의해 생겨나는 일은 다른 주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이나 비난이 따라붙도록 되어 있다."나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운동이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새로운 운동이 고정된 순서에 따라 이전 운동에서 생겨난다면, 그리고 운명의 고리를 깰 수 있으며 무한히 이전인 원인들에서 원인이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는 어떤 운동의 시작점을 기본 물체가 이탈을 통해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지상에 있는 생명체에 어떻게 의지가, 즉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이러한 자유의지가 있단 말인가?


   



  세계가 내적인 의지를 지닌 원자로 구성되어 있어서 예측 불가능하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에피쿠로스는 인간 또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원자로 구성된 인간도 당연히 내적 의지를 가지고 있겠지요.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유의지는 인과 필연성의 강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위를 의욕하고 실행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불확실한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두려움만을 안겨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계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과 필연성의 강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자유의지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세계가 인과 필연성에 따라 모두 예측 가능하게 굴러간다면,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의식마저 그러하다면 어떨까요? 나의 의지대로 사고하고 의욕하고 행위하는 것이 없다면, 확실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의미는 우리 인간 존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지만 불확실한 삶이 자유의지가 없는 확실한 삶보다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에피쿠로스와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필연의 세계라고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스토아 학파’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우리는 운명 안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운명이란 “그것에 따라 일어난 것이 일어났고 일어나는 것이 일어나며, 일어날 것이 일어날 그런 원리”(logos)’입니다.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사상가 ‘에픽테토스’는 우리는 운명에 따라 이루어지는 연극 안에서 정해진 배역을 맡을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운명에 따라 어떤 삶을 사는지가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 역할에 충실하면 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운명 안에서 정해진 확실한 삶을 생각해보니, 좀 억울한가요? 내가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그것이 운명이고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니. 억울하게 생각될만합니다.


  기억하라. 너는 작가가 원하는 대로 정해진 연극의 배우이다. 그가 짧기를 원하면 연극은 짧고 그가 긴 것을 원하면 연극은 길다. 네가 거지의 배역을 맡을 것을 작가가 원한다면, 이 역시 성실히 수행하라. 그가 장애자의 배역을 원하거나, 지배자의 배역을 원하거나, 평범한 사람의 배역을 원하거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오직 주어지는 배역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 만이 너의 임무이다. 그러나 배역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이의 일이다.





  스토아 학파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까요? 스토아 학파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달려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은 부, 명예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정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여 어떤 정신적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즉 다르게 말하면 ‘덕’입니다. 우리가 ‘덕’을 갖추느냐 갖추지 못하느냐가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요. 스토아 학파가 말하는 덕이란 자연에 합치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 정신을 자연이 원하는 것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이지요. 자연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선입니다. 지혜와 용기, 절제를 갖고 사는 것. 우리의 정신을 선에 합치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며 자연이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예와 부와 같은 것으로 인해 고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정신이 ‘선’에 합치되는가. 이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스토아 학파의 생각입니다. 스토아 학파의 생각에 따르면 세상이 내가 원하는 데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불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부와 명예 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것 같지 않다고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정신이 선을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스토아 학파가 불안감을 갖고 사는 우리에게 주는 이야기입니다.




  세계가 불확실한가 확실한가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고, 스토아에 따르면 필연적입니다. 이렇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두 사상가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정신’입니다. 세계가 불확실한 것이 맞아서 예측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고하고 의욕하고 행위하여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있는 것이지요. 바로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요. 세계가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해볼까요. 세계가 필연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정신은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고, 우리의 정신을 자연이 원하는 데로 선에 일치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세계가 나에게 준 역할에 대해 분노하고,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해 불안해하기보다 나의 정신이 선에 일치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스토아 학파는 말합니다. 길을 가다가 떨어지는 간판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면 어쩌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는데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쩌지? 내일 있을 승진시험에 나 혼자 낙방하여 창피를 당하면 어쩌지? 하고 우리는 수많은 고민을 합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전전긍긍하며 고민합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세계는 어차피 예측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 안에서 내가 행복하고 평온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의욕하고 행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토아에 따르면 미래의 일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혹은 신)이라는 작가에게 달린 것이지요. 우리는 작가가 정해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어서, 내가 가진 역할이 선한 사람이 되는가 악한 삶이 되는가는 나의 정신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나의 정신을 선에 일치하면서 살면, 궁극적으로 그것이 행복한 삶이 된다고 스토아 학파는 말합니다. 행복하다면 불안에 떠는 고통스러운 삶은 사라진 것이겠지요.




  두 사상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위로가 되실까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인가 봅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정신’인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 ‘정신’을 잘 다루어 평안하고 행복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존재가 해야 할 일인지 모릅니다. 불안하다면 나의 정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거기서 작은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참고 - 김상봉,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 한길사

이전 08화 윤리학이 주는 위로 - 집착으로 인한 불안에 대한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