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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재와시간 Oct 30. 2022

윤리학이 주는 위로 - 불안이 우리에게 주는 것

불안에 대한 위로

  욕구로 인한 집착에서 벗어나도, 불확실성에 대해 고뇌하지 않아도 우리는 불현듯 불안을 느낍니다. 어떤 이유에서 나에게 찾아왔는지 모를 불안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불현듯 섬뜩한 기분과 함께 불안이 엄습하곤 하지요. 그 불안은 나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미래가 불확실해서 그렇다고 보기도 부족한 형태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실존적 불안이라고 부르지요. 이러한 실존적 불안은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지만, 우리를 진실한 존재가 되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실존적 불안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우리를 찾아올까요? 실존적 불안에 대해서 이야기한 학자는 여럿입니다.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가 대표적입니다. 먼저 키르케고르가 말한 불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까요?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연관시켜 이해합니다.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이란 가능성과 연관된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생겨나는 실존의 근원적 감정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인간의 정신은 무한한 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 내지요.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나 자신은 미래를 알지 못하지만 자유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즉 자유인 내가 만들어낸 가능성이 실현되지만, 그 가능성의 실현에 대한 미래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키르케고르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을 실존의 근원적 감정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이데거 또한 불안은 본래적 실존을 회복시키는 출발점이라고 보았습니다. 본래적 실존이 비본래적 실존을 위협하면 불안이라는 감정은 야기됩니다. 이때 우리의 일상적 삶은 무화되지요. 즉 일상적 삶이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상적 삶이 무화되면, 나의 고유한 실존 가능성은 떠오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이 본래적 실존을 회복시키는 출발점이라고 하이데거는 본 것입니다. 고유한 실존 가능성이 개시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책임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유한 실존 가능성이 개시되는 상황은 우리에게 불안이라고 하이데거는 보았습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에서 발생하는 책임 의식으로 인해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와 실천으로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유는 상황 내 자유로 주어진 상황 안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라고 보았습니다. 상황 내 자유는 주어진 상황 안에 있는 자유로 책임을 달고 옵니다. 우리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유에 따른 행위는 상황 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요. 이를 사르트르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나에게만 앙가제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앙가제 한다.’ 즉 이러한 자유에 따른 책임이 우리에게 불안이라는 감정을 발생시킨다고 사르트르는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안의 상황에서 우리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따르면 불안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실존으로 이끄는 감정입니다. 이 실존적 불안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합니다. 첫 번째 도망치거나 나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면, 본래적 실존을 회복할 수 없겠지요. 이러한 선택을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이라고 불렀고, 하이데거는 '일상인'이라고 불렀으며,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이라고 불렀습니다. 유신론자인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빠짐으로인해 신과 단절된다고 보았으며, 하이데거는 '일상인'으로 살면 고유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으로 인해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부정하면서 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실존적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래적 실존을 회복한 존재를 유신론자인 키르케고르는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대중으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예외자이며, 신 앞에선 단독자로 주체적 결단을 내리는 존재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실존적 결단을 ‘죽음에로의 선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불안과 죽음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수하여 자신의 본래적 실존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앙가주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유 그 자체인 우리가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다할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불안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어떤 것일까요? 이미 아시겠지만, 바로 ‘신 앞에선 단독자’로 서고, ‘죽음에로의 선구’를 하고, ‘앙가주망’하는 것입니다. 즉, 실존적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안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존적 상황으로 우리를 불러들여, 실존적 선택을 하도록 실존의 첫 장을 열어주는 것이 불안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실존적 불안을 느끼고 있으시다면, 그 실존적 불안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본래적 내가 되기 위한 준비가 된 것입니다.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고 결단을 하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진실된 내가 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진실된 관계를 맺고 진실된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실존적 불안을 느끼고 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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