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나를 부풀어 오르게
- 쓸모없어 보이는 취미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순간들.
- 게임으로 '연민'을, 캠핑으로 '사랑'을, 독서로 '지식'을 배우다.
- 취미의 쓸모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록한 안내서.
우리는 종종 취미를 '쓸모없는 것'이라고 치부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 브런치북은 평범해 보이는 게임, 캠핑, 독서를 통해 취미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탐구합니다. 취미가 어떻게 저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그 여정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의 취미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볼 시간이 사라지면서 나는 점점 납작해져 갔다."
"책은 마치 프리즘과 같아서,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여러 빛깔로 펼쳐주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매미 소리가 교정에 퍼진다. 한 고등학생이 여름 햇살이 가득한 교실에서, 창가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급식을 먹으러 가는 친구들의 소리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늦게 도착한 사춘기는 쓸모없는 짐처럼 느껴진다. 반항적이고 충동적인 감정들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여름 방학이면 친구들은 가족 여행을 떠날 때,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한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논밭을 가꾸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사춘기의 감정들은 사치처럼 여겨진다.
사춘기는 더욱 내면으로 파고들게 한다. 중학생 때의 활발했던 모습은 사라져 나는 극도로 낯을 가리는, 조용한 아이가 되어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본관을 지나 별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조심스럽다. 별관 끝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깨에서 긴장이 조금 풀어진다. 책장 사이를 거닐며 깊은 숨을 내쉰다. 이곳은 안식을 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일본 문학 서가 앞에 멈춰 서서 책 한 권을 꺼낸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을 채운다. 나쓰메 소세키,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와 같은 근현대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열병 앓듯 탐독하며, 문학적 취향을 알아간다. 나에게 책은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닌, 자신과 마주하는 방법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의 창구가 되어가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겨우 찾아낸 공간과 이별했다. 대학과 사회생활은 숨 가쁘게 흘러갔다. 학교에선 졸업을 위해 게임을 만들어야 했고, 취업을 위해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했으며, 회사에선 고과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
고등학생 시절과 달리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 줄어들면서 책은 서서히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대학 입학 후, 스무 살부터 서른두 살까지 전공 서적을 제외한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볼 시간이 사라지면서 내 마음의 쉼터는 점점 좁아져 갔고, 나는 점점 납작해져 갔다.
죽음이 사춘기처럼 늦게 도착했을 때, 비로소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시, 소설, 철학. 이 세 권의 책은 메말랐던 나를 조금씩 부풀어 오르게 했다.
첫 번째 시작은 시집이었다. 권고사직과 이별이라는 '삶의 변곡점'에서, 어질러진 마음을 정리하듯 집 안을 청소하던 중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생일 선물로 준 정호승 시인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였다. 시가 좋다며 조심스레 건네던 그녀의 표정이 봄꽃처럼 화사해 더욱 기억에 남는 선물이었다.
붉은 사각형 안에 옆을 바라보는 여인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 여인은 제목처럼 외로워 보였지만, 여인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작은 새가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주는 듯했다. 퇴사 후 외로움이 스펀지처럼 내 몸에 스며들어 무겁게 짓눌렀다. 외로움은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열패감을 머금고 있었다.
조심스레 먼지를 털어내고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가 좋아했던 시, <수선화에게>가 눈에 들어왔다. '외로움은 인간의 본성이니,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는 구절을 곱씹어 읽었다. 새도, 하늘도 외롭다고 운다는 시인의 말씀은 외로움을 하찮은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했다.
시인의 시선에 내 시선을 겹쳐보니, 그동안의 내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죽음을 피하려 안쓰럽게 허둥대던 모습,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혼자 있기를 거부하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마치 칡덩굴이 나무를 감아 오르듯, 나는 그녀를 옥죄어왔다. 내 힘듦을 이겨내느라 그녀의 고통을 보지 못했다. 나무는 오래 견뎌냈지만,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 페이지를 넘겨 <후회>를 읽었다. 그대와 낙화암에서 백마강에 빠지지 못했던, 만장굴에서 바다에 빠지지 못했던 후회는 시의 행을 따라 흘러갔다. 내가 겪은 특별한 순간들이 보편적인 이별과 후회로 승화되어 있었다. 시인의 언어는 상처를 어루만지되, 그 아픔에 매몰되지 않게 도와주었다.
시를 읽고 뒤표지를 넘기자, 갈색으로 변색된 빳빳한 은행잎이 떨어졌다. 그녀가 책갈피로 쓰라며 넣어두었던 것을 잊고 있었다. 은행나무의 꽃말이 궁금해져 찾아보니 '희망'이었다. 그 순간, 외로움을 한편으로 밀어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에 피어났다. 내 마음을 이해하자, 내 마음이 쉴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두 번째는 소설이었다. 죽음의 늪에서 나를 건져 올린 것은 첫 캠핑에서 만난 자연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피어났다. 지금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변화하고 싶었다.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파도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이때가 표류하지 않고 파도에 올라탈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파도를 탈 수 있을까?' 캠핑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대형 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나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곳에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을 것 같았다.
구매할 책을 정하지 않은 채, 그 '어떤' 책을 찾아 서점을 헤맸다. 책은 많았으나,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서가를 뒤적거리다 고개를 돌리니 소설 섹션의 평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새로 나온 책부터 베스트셀러 표지를 단 책까지 다양하게 놓여있었다.
한 번도 읽은 적은 없지만,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책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어 올렸다. 일전에 회사 동료가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던 책이었다. 뒤표지에는 슈바이처 박사가 카잔차키스를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고민 없이 책을 구입했다.
창문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카잔차키스는 지적이고 내성적인 화자와 삶을 춤추듯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조르바의 대비를 통해 인생의 본질에 대해 질문했다.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화자처럼 책 속의 지식을 탐구하는 것인가? 조르바처럼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인가?
그는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결합할 때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인간은 자유와 같으니, 산다는 건 말썽을 피우는 것'이라고 확언하듯 말하는 조르바의 말이 와닿았다. 나는 파도를 올라타기 위해 준비만 하고 있을 뿐, 정작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해무가 걷히고 파도가 치는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춤을 추며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라'고 외치는 조르바의 모습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속 주인공 '귀도'를 떠올리게 했다. 아들에게 수용소에서의 잔혹한 현실을 게임이라고 표현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던 장면 속 귀도.
조르바와 귀도의 공통점은 삶의 모든 경험, 심지어 고통까지도 아름답게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경험이 유일무이한 것이니, 그 모든 것을 진정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르바처럼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관점과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파도에 올라탈 방법이었다. 나는 이제 파도 위에서 조금씩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마지막은 철학이었다. 시간이 흘러 외로움은 옅어지고, 삶에 대한 의지가 생겨났다. 재취업을 준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운 좋게도 원하던 회사에 합격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는 동안 뜻 모를 공허함에 한동안 슬픔을 짓이겼다.
사람들과의 사적인 만남을 피하고 일에만 몰두했다.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쏟을 만큼 쏟아내서 바싹 마른 마음이 가뭄 난 땅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병원에 가봐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서점에 들렀다. 혹시나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책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서가를 살폈다. 우연히 평대에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철학 섹션이었다.
철학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기에, 내 마음의 원인을 찾아줄 것 같았다. 철학 평대 중앙에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위치는 이 책이 가장 많이 팔리는 책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단순히 '사랑하는 방법(Technique)'을 알려주는 심리 에세이로 오해하고 있었다. 원제 'The Art of Loving'을 직역하면서 빚어진 해프닝 같았다. 'Art'는 이해와 통찰을, 'Technique'은 기계적인 습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프롬이 왜 책 제목을 'The Art of Loving'으로 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을 이해하고 통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그 의미에 끌렸다. 이번에도 고민 없이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나는 사랑이란 단순히 남녀 간의 감정에 국한된 것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프롬은 에로틱한 연인의 사랑을 포함해 종교, 자기애, 형제애, 우정,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등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마주하는 세상 모든 것들이 사랑의 대상이었다.
편협했던 관점이 넓어지며, '사랑은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는 것'이라는 그의 사랑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지금껏 사랑을 받기만 했다.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물려준 부모님뿐만 아니라, 만났던 연인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주기보다는 보호, 관심, 경험 등 많은 것들을 받기만 해왔다.
사랑을 이해하고자 페이지마다 줄을 긋고 필사를 했다. 그러는 동안 텅 비어 있고, 가뭄처럼 갈라져 있던 마음의 원인을 찾아냈다. 그것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기에, 그 어떤 것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프롬의 말에 따라, 사랑을 바라지 않고 주기로 했다.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하고, 누나와 동료에게 곁을 내어주고, 신과 자연에게 마음을 맡겼다. 사랑은 주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열어 두는 것임을 배웠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마음에 물이 차올라 윤슬이 반짝이는 호수가 만들어졌다. 나를 찾는 이들에게 물을 건넬 수 있게.
책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넘어, 회색빛 일상을 형형색색의 풍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세 권의 책을 만났다. 그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그 영향은 필연적이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내 안의 외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법을, 『그리스인 조르바』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사랑의 기술』은 타인을 이해하고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이 책들은 마치 프리즘과 같아서,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여러 빛깔로 펼쳐주었다.
앞으로 만날 책들을 생각하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차오른다.
+삶의 경험들이 모여,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