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 상실감 속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 쓸모없어 보이는 취미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순간들.
- 게임으로 '연민'을, 캠핑으로 '사랑'을, 독서로 '지식'을 배우다.
- 취미의 쓸모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록한 안내서.
우리는 종종 취미를 '쓸모없는 것'이라고 치부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 브런치북은 평범해 보이는 게임, 캠핑, 독서를 통해 취미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탐구합니다. 취미가 어떻게 저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그 여정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의 취미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캠핑은 자연의 섭리인 계절을 자세히 보게끔 만든다."
"오감으로 계절을 기억하려 애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캠핑하다 보면, 자연스레 각 계절의 특징을 온몸으로 배우게 된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는 당연한 경험이지만, 자연 속에서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을 통해 계절의 변화는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여름을 수놓던 붉은 목백일홍이 시들어갈 때면 가을의 발걸음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봄의 전령사인 목련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섬세하여, 꽃샘추위에 서리를 맞으면 제대로 피어나지 못한다. 서리 맞은 목련을 보면 진정한 봄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바쁜 출근길에서는 스쳐 지나갔던 것들이, 캠핑장에서는 마치 눈앞에 폴짝 뛰어온 듯 뚜렷하게 보인다. 캠핑은 자연의 섭리인 계절을 자세히 보게끔 만든다.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지만, 캠핑만큼은 여름에 가지 않는다. 높은 습도와 온도는 나를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한다. 텐트를 설치하는 순간부터 해제하는 순간까지 오직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맴돈다.
8월의 무더위 속에서 첫 여름 캠핑을 하러 갔던 때가 떠오른다. 좋아하는 계절에 좋아하는 꽃을 본다는 것은 분명 행복일 터. 나는 능소화가 심어진 경기도 연천의 한적한 캠핑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논으로 둘러싸인 나의 고장과 흡사했다. 주변 논에는 배수를 위해 도랑이 파여 있었고, 그곳에 고인 물이 햇빛에 반짝였다.
삼십 도가 넘는 뙤약볕 아래서 간신히 텐트를 설치하고 쉬고 있는데, 도랑에서 모기떼가 달려들어 한숨 돌릴 틈도 없었다. 이 경험이 내 마지막 여름 캠핑이 되었다.
그 경험 이후, 나는 캠핑 시즌을 개천절부터 어린이날까지로 정했다. 개천절 무렵부터는 기온이 이십도 내외로 떨어져 선선해진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불면 여름내 몸에 쌓였던 더운 기운이 흩어지는 듯하다. 몸과 마음이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가을은 '가을걷이'로 부모님이 가장 바쁜 시기다. 이모작하시는 부모님은 벼를 수확한 논을 갈아 밭으로 만들고 마늘을 심으신다. 밭에서 일손을 돕다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하늘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 있는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큼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 마치 저 석양처럼 짙게 물든다.
가을 석양은 나에게 늘 부모님을 떠올리게 한다. 10월부터는 단풍 구경이 아닌, 석양 구경을 떠나야 한다. 마음이 외로울 때면 붉은빛으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공허함이 채워지는 듯했다.
나는 인천 강화도의 캠핑장으로 향했다. 김포한강로를 따라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서면, 남쪽으로 동검도라는 작은 섬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자리 잡은 캠핑장은 높은 지대에 있어 서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절경을 자랑한다.
해가 바다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하면, 마법과도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옅은 흰 구름이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일렁이는 파도를 따라 바다의 윤슬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자연이 머금은 색채들이 순식간에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절로 생겨난다.
해가 바다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면, 까만 밤이 삽시간에 찾아온다. 그 순간부터 온도가 떨어져 살짝 쌀쌀해진다. 작은 난로에 등유를 채워 텐트의 온기를 높이면, 그제야 안도감이 찾아온다. 높고 낮은 풀숲 사이로 풀벌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이 온도와 소리를 통해 나는 가을이 온 것을 확인한다. 단열이 잘된 창문과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시의 집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오감의 향연이다. 그동안 내 인생을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계절들이, 이제는 내 몸에 직접 닿으며 여기 있다고 소리치는 것 같다.
몰랐던 것들에 대한 인식. 캠핑은 자연의 변화를 통해 나 자신의 변화도 알아차리게 해준다.
석양으로 가을을 느끼고 배웠다면, 이제는 겨울의 차례다. 겨울에는 눈을 빼놓을 수 없다. 흰 눈은 농번기의 고된 농사일로 지친 몸을 달래주는 자연의 선물 같은 존재다. 땅이 얼어붙어 작물을 심을 수 없을 때, 오히려 농부의 삶에 활기가 돋아난다.
농부에게 겨울은 떳떳하게 쉴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다. 논밭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면, 땅속에 잠들어 있는 마늘이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은 농부에게도, 작물에게도 휴식의 계절이 왔음을 알려주는 자연의 신호다.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이 주로 겨울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모님에게도 휴식이었지만 나에게도 휴식이다. 겨울은 자연과 우리 가족 모두에게 휴식인 계절인 셈이다.
1월부터는 이불 속에 있을 게 아니라, 눈 구경을 떠나야 한다. 눈에 덮인 자연을 바라볼 때 비로소 진정한 휴식을 얻은 기분이 들 테니까. 나는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강원도 홍천의 캠핑장으로 향했다.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홍천강휴게소 방면으로 이동하면 목적지인 캠핑장이 나온다. 홍천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속 도로는 이미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나뭇가지들은 쌓인 눈의 무게에 축 처져 있지만, 얼어붙은 눈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주변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마치 동화 속 세상 같았다. 꽁꽁 언 손끝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텐트를 설치하고, 서둘러 난로에 등유를 채웠다. 불이 뭉근하게 피어오르자, 내 마음도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텐트 안 온도계가 영상 20도를 가리키고 있다. 현재 외부 온도는 영상 3도이고, 밤에는 영하로 떨어진다는 날씨 예보를 살폈다. 겨울 캠핑은 온도와의 끊임없는 줄다리기다. 온도를 너무 높이면 건조해서 생활이 불편해지고, 그렇다고 낮추면 추워서 잠을 이루기 힘들다.
마치 샤워할 때 적절한 온도를 찾는 것만큼이나 섬세한 조절이 필요하다. 온도계와 한참을 씨름하다 보니 어느새 배가 고파온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장 김치를 꺼내서 라면과 함께 먹었다.
텐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하얀 눈뿐이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흰 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달빛을 받아 더욱 영롱하게 빛난다. 저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논밭의 마늘 위로 덮인 흰 눈이 떠오른다.
지금쯤 그 눈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실 부모님의 모습도 상상된다. 부모님의 전화 한 통에 마음이 다시 한번 뭉근해진다.
흰 눈으로 겨울을 느끼고 배웠다면, 이제는 봄의 차례다. 봄은 다른 계절과 달리 기다림의 계절이다. 겨우내 품었던 마음에 영양분이 전달되는 계절. 곧 피어날 새싹에 대한 기대감과 싹이 돋아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봄이 되면 마음이 괜스레 분주해진다. 부모님은 봄을 기다렸다는 듯이 때에 맞춰 비닐에 들어가 있는 마늘을 살핀다. 겨울의 추위에 병이 들진 않았는지, 싹이 잘못 자라진 않았는지 꼼꼼히 보살피신다.
그러나 병이 들어도, 싹이 잘못 나도 무엇을 탓하지 않으신다. 결국 기다림 끝에 마주한 것은 자연 그 자체였다.
4월부터는 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봄을 찾아 꽃구경을 떠나야 한다. 꽃들은 온도와 조도에 예민하여 조금만 놓쳐도 금세 철이 지나버린다. 오죽하면 SNS에 벚꽃을 보지 못해 불행하다는 글이 올라올까. 그러니 불행을 피하려면 꽃 필 때를 맞춰 떠나야 한다.
대표적인 봄꽃인 벚꽃은 제주도와 남부 지역에서 3월부터 개화를 시작한다. 때맞춰 벚꽃을 보러 김포의 캠핑장으로 향했다. 강화도 캠핑장과 마찬가지로 김포 한강로를 타고 가다 보면 문수산 자락에 있는 캠핑장을 만나게 된다. 벚꽃 캠핑장으로 너무 유명해져서인지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텐트를 설치하고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 설치된 텐트들은 벚나무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도 그 열에 합류해 텐트를 설치했다. 벚나무의 가지마다 연분홍빛 꽃이 달려있지만, 아직 만개하진 않았다. 몇몇 흰 꽃봉오리는 살짝 벌어져 안쪽의 꽃잎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변 텐트에서는 벚꽃이 만개하지 않아 아쉽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살랑거리며 꽃잎이 텐트 위로 날아들었다. 검은색 텐트에 연분홍 꽃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텐트 앞에 의자를 펼치고 앉아 '벚꽃멍'에 빠져든다. 저녁이 다가오자, 석양의 붉은 빛으로 흰 꽃봉오리가 만개한 벚꽃처럼 붉어졌다.
예상한 개화 시기에 방문했지만, 만개한 벚꽃을 보지 못했다. 자연은 쉽사리 예측 당하지 않는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생리에 맞지만,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때쯤은 피고 질 것이라 예상한다.
예상이 빗나가면 쉽게 실망한다. 봄은 우리에게 이런 예상을 과감히 버리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기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라고. 꽃이든 꽃봉오리든 새싹이든.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니 그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봄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부모님이 봄의 밭에서 마주하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처음 말했듯이 여름 캠핑을 꺼리는 것일 뿐, 여름은 내 최애의 계절이다. 이 계절은 내가 사랑하는 꽃들이 활짝 피어나는 시간이다. 붉은 꽃잎을 자랑하는 능소화와 해당화, 순백의 순수함을 뽐내는 쥐똥나무와 개망초, 태양 빛을 담은 노란 달맞이꽃과 금계국이 눈에 띄면, 나는 주저 없이 그곳으로 달려간다.
꽃에 코를 가까이 대고 향을 음미하며 기억 속에 새긴다. '올해도 피어나 줘서 고맙다'고 속삭이며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그리고 '내년에 또 보자'는 눈인사를 나누며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오감으로 계절을 기억하려 애쓴다. 계절은 매년 돌아오지만, 내가 매번 그 자리에 있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눈으로 한 움큼 쥐어다가 마음에 잔뜩 심어 둔다.
캠핑은 우리를 자연과 가까이하게 하고, 그 아름다움을 마음에 새기게 한다. 또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섬세하게 바뀌는 자연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사계절을 자연 속에서 캠핑하며 나는 삶의 귀중한 교훈들을 얻었다. 가을은 풍성함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법을 알려줬고, 겨울은 고요 속에서 여유를 찾는 법을 가르쳐 줬다. 봄은 시작 앞에서 실망하지 않는 법을, 여름은 열정적인 순간들을 기억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면, 그리고 캠핑이라는 특별한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이 값진 가르침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 혼자이기에 더욱 선명했던 순간들, 그리고 함께하며 배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