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을 그만둔 후 다른 항공사를 타게 되면 나도 모르게 구경꾼 모드가 된다. 이 항공사 승무원들은 어떻게 서비스를 하나, 이곳은 승무원이 일하기에 쉬울까 어려울까. 이런저런 생각과 구경으로 비행기를 타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즐거움이다.
작년 국내 메이저 항공사를 탄적이 있다.입사 전에 타보고 처음이었으니 한 7년 만이었던가. 그날도 어김없이 열심히 두리번거리며이곳저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ABC-DEFG-HJK)의 좌석중 맨 앞자리 G에 앉아있었다.맨 앞줄 HJ에 앉은승객 두 분이 큰 기내용 가방 두 개를 앞 공간에다 내려두고 거기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승무원은 그분들께 곧 이륙을 하니 짐을 위로 올려주십사 정중히 부탁했는데, 그들은 대답만 하고 가방을 바로올리지 않았다.
승무원은 부탁을 하고 다른 곳부터이륙 준비를 위해 캐빈 시큐어(cabin secure: 기내 안전 체크)를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언제 짐을 올릴 것인가 하고 곁눈질로 조심조심쳐다보았다. 호기심 반. 오지랖 반. 아까의 그 승무원이 캐빈 시큐어를 끝내고 한참 뒤에 그 승객들의 옆으로 다시 다가왔을 때까지도 짐은 그 자리 그대로였다.
전 항공사의 승무원들이었으면 짐을 지금 당장 올려달라고 굉장히 단호하게 얘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승무원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승객님, 제가 이 짐을 올려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렇게 극존칭을 쓰며 양해를 구하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에나 마상에나. 부부로 보이던 그 승객 두 명은 오케이의 의미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제야 그들은 기내 가방에서 다리를 뗐다. 감정이입을 깊게 한 나머지 뒷골이 당겼다. 아이고 내 두(頭)야.
개미랑 싸워도 질 것 같은 가녀린 그녀는 왜 겁도 없이 저 무거운 짐을 휘청거리며 드는 것인가. 장래희망이 역도선수라도 되는 것인가. 제2의 장미란을 꿈꾸기라도 한단 말인가.
얼마 전 몇 년 만에 전 직장 동료를 우연찮게 만났다. 그녀의 예쁜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손에 칭칭 둘러진 압박밴드였다. 이게 뭐냐고 묻자 그녀는 웃으며 승객의 짐을 올리다가 다쳤다고 말했다.요즘은 허리까지 말썽이라고 했다. 그것 때문에 병가까지 냈다고 하는데 마음이 씁쓸했다.
어떤 직업이든 몇 년씩 같은 일을 하면 직업병을 얻게 된다.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골고루 얻게 된다. 어디 남의 돈 벌기가 쉬운일인가.다들 나름의 고충과 애환이 있다. 승무원 같은 경우도 역시 여러 개의 직업병이 있다. 흔한 직업병중 하나는 허리디스크이다.
수백 킬로에 달하는 카트를 밀고 끌고, 수 킬로의 컨테이너를 역도 하듯이 들었다 놨다반복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승객들의 무거운 기내용 가방을 비행마다 들었다 올렸다 하기도 하니 허리디스크로 고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지 싶다.
나는 웬만해서는 먼저 승객의 짐을 들어서 올리지 않았다. 매 비행에서 내가 그렇게 허리를 혹사할 경우 몸상태가 어찌 될 것인지는선배들을 보고 학습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승객들에게 본인의 짐을 스스로 올려줄 것을 정중히 부탁을 했다. 그들이 끝까지 짐을 내버려 두는 경우에는 같이 들어 올리자고 요청했다. 국내 항공사의 그 승무원처럼 나 혼자 짐을 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제 아무리 통짜허리라고 해도 내 허리는 소중하니까.
하지만노약자와 아기 엄마는 제외였다. 그들에게까지 알아서 짐을 올려달라고 할 정도로 매정한 승무원은 아니었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승무원과 함께 어기여차어여차 해서 짐을 올리곤 했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였다. 멋지게 옷을 빼입은 중년 남성이 웃으면서 나를 불렀다.
짐 좀 올려줘.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혼자 짐을 올릴 수 없는 이유라도 있는지 말이다. 그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무거워서 못 들어.
그 덩치 좋은 승객 눈에는 내가 소도 때려잡게 생겼었나 보다. 무거워서 못 드니 대신 들어달라니. 빵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신에게 무거우면 나한테도 무겁지 않겠냐고 되물었더니, 그 승객은 대답 없이 넉살 좋게 웃기만 했다.
승무원의 주요 임무는 기내 안전, 보안 책임이다. 그리고 그다음이 서비스 제공이다. 승객들이 있기에 승무원이 존재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승객들의 무리한 부탁까지 일일이 들어줄 수는 없다. 나는 모든 승객들이 승무원은 기내에서 밥이나 주고, 짐이나 드는 것만임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승객들이 알지 못하는 더 무궁무진한 임무가 그들의 어깨 위에 있다. 그러니까, 기내 가방 정도는 스스로 책임져주셨으면 한다. 승객들에게는 한 번이지만 승무원들에게는 수십 번, 수백 번의 뼈가 닳는 노동이 되기 때문이다.
<승무원 시리즈의 글은 저의 매우 개인적이며 주관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수많은 전현직 승무원들을 대표하는 글이 아님을 미리 밝히고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