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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Oct 25. 2021

모든 집에는 분위기가 서려 있다

사과나무가 있던 큰 외삼촌네 집을 닮은 옥상을 가졌다  

 '멍멍 계단'이 있는 할머니 집보다는 어릴 때부터 아무래도 외갓집이 편했다. 무엇보다 외갓집은 2층 단독주택의 사과나무가 있는 집일 때도, 넓은 정원이 있는 전원주택일 때도 모두 좋았다. 외갓집은 늘 사촌 언니와 사촌 오빠들로 북적였고, 갈 때마다 어린 마음에 어린 조카들 눈높이에 딱 맞춘 큰 외삼촌의 이벤트가 있었다.

제법 큰 집이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사람 냄새 가득하던 집이었다. 아래로 동생이 둘 있는 내가 유일하게 '막내 취급'받으며 사촌 언니, 오빠들에게 매달리며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집도 외가댁이었다.

큰 외갓집 식구들은 참 따뜻한 분이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빈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외가의 사랑을 듬뿍 주셨다. 사촌들과 내 동생들까지 다 모여도 누구 하나 섭섭하지 않게 사이좋게 돌아가면서 놀 수 있는 놀잇감을 주셨고, 늘 다정하셨다. 어린 시절의 신나는 놀이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외갓집 추억이다.


 결혼 전 남편을 데리고 첫인사를 갔을 때 장롱 안에서 꺼내어 내어 주신 선물은 유치원생인 내가 큰 외삼촌께 삐뚤빼뚤 써 보냈던 첫 번째 편지였다. 그걸 삼십여 년이 지난 세월 동안 고이 간직해오신 마음에 그 자리에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큰 외삼촌은 아들 둘에 딸이 하나 있다. 엄마와 막내 이모는 결혼 전까지 한 집에 같이 사셨다고 했다. 나이 차가 꽤 나는 어린 여동생이 낳은 첫 딸인 내가 결혼한다고 예비 신랑을 데리고 왔으니 마음이 울컥하시면서도 또 뿌듯하셨을 것 같다. 외삼촌의 마음은 넓었다. 뛰어도, 노래를 불러도 그저 하회탈 웃음처럼 웃으셨다. 어린 마음에도 외갓집의 넓은 정원보다 외삼촌께는 무얼 말씀드려도 다 들어주실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었다. 큰 외삼촌은 엄마 위로 몇 명을 건너 한참 위의 형제셨다. 엄마도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공부하고 직장 생활을 하며 아빠랑 결혼하기 전까지 큰 외삼촌 집에서 함께 지냈다고 하셨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고, 곧잘 글을 써서 늘 상을 휩쓸어오는 아끼는 동생이었으니 그 동냉의 딸인 내가 아마 손녀 같았으리라.. 내 이름도 큰 외삼촌이 지어주셨다. 예비 조카사위에게 잘 살라는 말씀 대신 그렇게 고이 간직해주신 어린 내 손 편지와 외갓집에서 뛰어놀던 유년 시절 내 모습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깨가 쫙 펴졌다. 그날 그렇게 함께 외갓집에 다녀온 남편은 여전히 우리 외가에도 잘하고, 내게는 더 잘한다.  (나도 잘할게 신랑!)

 

 모든 집에는 그 집만의 분위기가 있다. 외갓집 큰 외숙모의 방에는 늘 먹 냄새가 났다. 고상한 한복이 한편에 걸려 있고, 엄마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그림 같은 한자 글씨가 내 키와 동생 키를 더한 것보다 더 긴 종이에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서예 국선에도 당선한 멋진 경력이 있는 큰 외숙모의 방 다웠다. 어린 나이에도 큰 외숙모는 어떤 선생님보다 멋있게 보였고, 늘 인자하게 웃어주시는 품이 좋았다. 그 외숙모가 낳은 아들인 큰 안경에 키도 큰 외갓집 첫째 오빠는 늘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 의대를 다닌 큰 오빠 방에는 우리가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이야 독서실도 많고, 스터디 카페도 얼마든지 많지만 그때는 공부하는 수험생이 있는 방 앞을 지날 때면 까치발을 들고 다니며 모두가 배려해줬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어린 사촌 동생이 놀러 온 날이면 잠깐 문을 열어서 책상 위의 인체 모형이나 해골같이 생긴 걸 돌려서 보여주곤 했다. '공부를 잘하면 이런 무서운 걸 만져야 되는구나'하고 겁  쫄보 어린이는 '난 의대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의대 갈 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했으면서.. 하하)


첫 분양받은 아파트가 여러 사건 사고로 시끄러워지자 과감하게 포기하고 또래나 친구들에 비해 꽤 늦게 내 집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여태 집 정리도 잘 안 하던 내가 집 꾸미기에 욕심이 생겼다. 구축 아파트를 계약하면서 집 내부를 전체 리모델링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결정하고 인테리어 업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꾸 욕심이 커진다. '이것만'하려다가 '이것만'을 가능하게 하느라 '저것까지'해야 하고, '저것까지' 하다 보니 '그것'도 추가해야 했다. 그렇게 여기저기 영 끌 해서 대출 없이 집을 마련하고, 가지고 있는 내에서 인테리어 리모델링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옥상이 걸렸다. 데크를 전체 다 까는 데는 거주 공간의 인테리어만큼의 비용이 들어가는데 아파트 탑층이 쓰는 단독 옥상이지만, 관리사무소에 여러 시설 허가도 필요했고, 나무 데크를 깔기만 하는 것이 아닌 철구조물이 있는 상태에서 데크를 깔아야 해서 상상 이상의 비용 지출이 필수였다. 데크를 깔고, 화분을 두고, 멋진 테이블을 두고, 지붕을 덮을 만큼 큰 파라솔도 설치하려고 보니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루프탑이 있는 카페들이 자릿세 받듯 커피값을 비싸게 받는 이유를 아주 잠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옥상을 그대로 두기에는 이 집을 선택한 메리트가 없었다. 사과나무가 있던 외갓집을 다시 떠올리며 일단 사과나무를 들이기로 했다. 데크는 포기하고 화분을 빙 둘러서 옥상 정원처럼 꾸며보기로 스스로를 달랬다. 아직 사과나무에 사과가 달리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선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를 두어 그루 두고 싶지만, 옥상까지 나무 화분 올리자고 사다리차를 부를 수도 없었다. 이사 올 당시에는 한창 뜨거운 8월이었기 때문에 옥상 땡볕에 나무를 두기도 어려웠었다. 이사하기까지 마음속에 그리던 '저 푸른 초원 같은 집'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외갓집의 푸른 초록이들은 정말 정성이었고, 외갓집만의 분위기였다. 큰 외삼촌과 큰 외숙모의 정성옥상이 생겼다고 단 시간에 흉내내기에는 내 마음이 조급하고 부족했다. 옥상 가드닝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 1987년 서대문구 연희동, 창천동의 외갓집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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