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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Oct 25. 2021

'개' 편한 집, 할머니 집  

멍멍 계단 트라우마

 할머니 집에 가는 날이면 꼭 긴 바지에 비 오는 날 신는 레인 부츠를 신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봄이든 여름이든  상관없이 꼭 제일 튼튼해서 절대 찢어지지 않을 바지와 그 바지마저 보호해줄 부츠가 필요했다. 엄마는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꼭 원피스에 타이즈를 신 예쁘게 입히길 원하셨다. 평소에는 빙그르르 돌아서 꽃잎처럼 원을 그리는 치마만 입겠다고 고집했으면서도 어쩐지 할머니 집에 가는 날이면 세상에서 제일 강하게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꼭 현관 앞에서 승강이를 하다가 결국 엄마가 입혀준 원피스에 다리에 찰싹 붙는 흰 타이즈를 신고 아빠한테 달랑 안아 올려져 차에 타곤 했던 일곱 살의 기억. 차를 오래 타서 멀미를 하는 것인지, 가기 전부터 만날 빌런(!)들에 대한 마음의 준비인지 늘 속이 메스껍고 힘들었다. 바지도 입지 않고 부츠도 신지 않아서 몹시 불안했다. 집에서는 그렇게 아빠께 달랑 안겨있는 것이 불편해 빨리 내려오려고 했지만, 할머니 집 길가에 도착한 순간부터는 어떻게든 아빠에게 안겨 있으려고 했다. 그때마다 바리바리 싸온 짐은 모두 엄마가 들 수밖에 없었다. 한 층을 올라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그때부터 하늘 쪽에서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목을 더 꽉 붙잡는다. 한 층 더 올라 3층으로 올라가면, 그때 소리는 볼륨을 키운 컹컹이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휴... 이제 다 왔다는 아빠에게 꼭 다짐을 받는다.

"아빠, 나 내려놓으면 안 돼, 꼭 할머니 집 ''에 내려줘야 해."

"응, 그럼. 그럴게."

그렇게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는 사이 몇 번의 다짐을 받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달려드는 개님(!)들 덕에 언제나 울음을 터뜨리며 요란하게 할머니 집을 방문했었다.

할머니 집은 우리 집에서 꼬박 한 시간을 차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중화동 4층 건물, 당시 포항제철 스포츠 팀 소로 쓰는 건물의 꼭대기 층에 별도로 지어진 넓은 주택이 있었고, 그 주택 마당에는 할머니 집 식구보다 많은 개가 여러 마리 있었다.  아빠가 결혼으로 분가하기 전부터 키운 강아지들이 제법 커서 용맹하고 무서운 큰 개가 되었다. 어린 나보다도 큰 개가 서너 마리 있는 할머니 집은 마당에 나가볼 엄두가 안 났었다. 사실 개에게 물린 적도 없고, 그 개들이 나를 위협한 적도 단 한 번도 없다. 늘 부대끼며 같이 살던 아빠가 결혼 후 오랜만에 방문하면 그저 아빠가 반가워서 달려들어 꼬리도 흔들고 짖으며 인사하는 것인데, 늘 아빠에게 쏙 안겨있다 보니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개들은 늘 위협적으로 느껴졌었다. 아빠에게 안기지만 않았어도 사실 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줄도 길게 매어 두고, 자유분방하게 개를 키우시던 할머니네 4층 계단은 늘 식은땀 범벅이었다. 마당이 있어 좋았는지 기억보다는 늘 긴장상태에서 갈 수밖에 없었던 집이었다. 해가 잘 들고, 할머니가 곶감 식혜를 주시고, 늘 보듬어주셨어도 할머니 집 하면, '개 편한' 집이라는 수식어만 떠오른다. 아직도 어디서든 계단을 오를 때는 귀를 쫑긋하게 된다. 내려갈 때는 더 그렇다. 어디선가 계단을 어기적어기적 거리며 오르내리는 나를 발견한다면 그건 '멍멍 계단'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 개들보다 훌쩍 큰 지금도 개 짖는 소리만큼은 영 달갑지 않지만, 이후로 친정에서 키운 강아지들과 조금씩 친해질 수 있었다. 멍뭉이들이 나오는 영상클립을 종종 들여다봐서인지 폰에는 가끔씩 사료 광고가 뜬다.


TV 가구 광고에서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소파에 앉아 코를 드르렁 골며 자는 멍뭉이가 보인다. 이제는 할머니 댁이 없어졌지만, 다시 간다면, 멍멍계단을 조금은 씩씩하게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 1983년 동대문구 중화동 할머니 댁을 떠올리다.

(당시에는 중랑구가 아닌, 동대문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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