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에는 '딸기코 할아버지'가 있다
그네가 있던 첫 번째 놀이터와 히어로였던 '딸기코 할아버지'
북적거리던 놀이터의 아이들이 흩어지고, 땅거미가 깔리기 전 6층 베란다 창문이 열린다. 만날 똑같은 앞치마를 한 젊은 여성이 손짓을 한다. 엄마다. 여러 번 손짓하는데도 못 본 척 계속 그네를 타는 아이 둘은 나와 내 동생이다. 엄마의 애타는 손짓에 어린 마음은 늘 아쉽다. "밥 먹을 시간이야. 얼른 들어와." 메아리치듯 울리는 엄마 목소리에 "네-에!" 대답은 한다. 대답 후에도 꼭 그네를 더 타다가 결국 한 소리 듣곤 했었다. 그때는 동생이 한 명뿐이었는데, (이후 내가 9살 때, 막내 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난다.) 그네를 타며 다리를 높게 차 올리면서 몇 층까지 다리를 쭉쭉 뻗을 수 있나 내기를 했었다. 두 살 아래 동생은 나보다 키가 두 뼘이나 작았고, 그러니 다리를 아무리 차 올려도 고작 그네가 앞뒤로 조금씩 왔다 갔다 하는 정도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때마다 언니로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과 약간은 동생에게 뻐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더 열심히 다리를 차 올렸었다. 치마가 나비 날개처럼 펄럭이고 그네가 하늘 방향으로 움직일 때, 다리를 쭉 폈다가 내려올 때는 양다리를 수영하듯 각각 반원을 그리며 내려왔다. 그래야만 힘을 받아서 다음에 그네가 올라갈 때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동생이 그걸 따라 하다가 결국 그네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높이 날아오르던 내 그네는 가속력 때문에 바로 설 수 없었다. 떨어진 동생을 잡아주려고 마음만 급하다가 그네랑 같이 꼬여버리기도 자주 있었다. 지나가던 어떤 어른이 우릴 못 봤더라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기도 했다. 동생은 땅에 널브러져 있고, 나는 그네가 꼬여서 거미줄에 갇혀 발버둥 치는 애벌레 같았으니까. 그 이후로 놀이터는 한동안 베란다에서 내려다봐야만 했다. 그 이후로 그네를 타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놀이터를 지나칠 때면 이제는 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그때보다 몇 배는 더 많아진 몸무게를 자각하며 더 큰일 난다고 혼자 타이르다가 어린이도 아니고, 아줌마가 그네에 뱅뱅 돌려 묶여 있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다음 주에 네 살 조카나 열심히 태워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행히 하나뿐인 조카는 그네를 아주 좋아하고 잘 탄다.
기억이 나는 어린 시절의 집은 6층, 놀이터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 동이었다. 1980년대 지어진 대치동의 복도식 아파트였다. 지금 부동산 시세로 치면 엄마 아빠가 그 집을 왜 팔고 이사 가셨을까 싶은 생각이 아주 짙어지는 몹시 안타깝고 아쉬운 동네다. 하지만 아로새겨진 추억들이 많아 든든한 주춧돌 같은 집이니 그걸로 이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라고 쓰고 아쉬움은 잊기로 했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또렷한 사람들도 있지만, 난 왜인지 이 집에서부터의 기억만 선명하고, 그 전 어린 시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첫 번째 집을 떠올리면 이 공간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유치원 버스를 타러 아침에 서두르던 기억, 호랑이가 그려진 시리얼을 아침마다 먹던 기억, 아파트 화단 여기저기에서 풀을 뜯어다가 소꿉장난 하던 기억, 퇴근하고 늦게 들어오시는 아빠를 동생 손잡고 기다리며 노래를 한없이 부르던 추억들은 그림책의 한 페이지처럼 선명한 그림체로 기억한다. 집은 집 구조 만이 다가 아니다. 이 시절 기억이 예쁜 그림책처럼 남은 이유 중 하나는 아파트 경비아저씨 덕분이다. 약간 딸기코인 그 할아버지는 영웅이었다. 짖궂은 장난을 치는 남자 애들이 있으면 꼭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난다는 홍반장처럼 쓰윽 나타나셔서 적당히 혼쭐을 내주셨다. 가끔은 뭐 저렇게 까지 보호를 해주시나 싶을 정도로 어린 마음에 약간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동생과 소꿉놀이에 빠져 있을 때 자꾸 한 역할 맡으려고 하시는 것도 어릴 땐 조금 귀찮기도 하고 부끄럽고 쑥쓰러웠다. 그 시절은 요즘처럼 경비 아저씨들의 업무가 많지 않은 때이기도 했겠지만 우리를 친손녀처럼 참 예뻐하셨었다. 유치원에 가서 우리 아파트에는 딸기코 할아버지가 있다고 자랑도 했었으니까. 나중에 안 사실인데, 아빠는 퇴근길에 늘 정문 경비실에 들러 잘 부탁드린다며 음료수도 건네 드리고, 가끔씩 담배도 사다드리고 했단다. 그야말로 동네 소문난 딸 바보여서 낮에 놀이터에서 보이면 잘 부탁드린다는 신신당부가 만들어낸 ‘임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동생과 나는 늘 ‘딸기코 아저씨’라고 부르며 반쯤은 놀리듯 친근하듯 실제 할아버지처럼 대해드렸다. 실은 “딸기코 할아버지”라고 했다가 엄마께 “할아버지는 아니셔”라는 말을 듣고 아저씨로 정정하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 우리 노래를 들어주시고, 놀이터에서 소꿉장난할 때 쓰라고 클로버랑 풀들도 잔뜩 따다 주시곤 하셨었다.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선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 1986년, 한티역 지하철공사가 한창이던 대치동 청실아파트를 떠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