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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Oct 25. 2021

집순이가 체질입니다만

미처 몰랐던 내 체질발견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나 많다니, 집에서 안 해도 되는 일이 이렇게 많다니를 깨닫는 날들.

어떤 날은 아침부터 너무 정신이 없다. 남편이 출근하고 내가 스케줄이 없는 날은 정말 오롯이 내 시간으로 집순이 모드를 즐길 수 있는데도 말이다. 육아도 없고, 모셔야 할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집에서 '혼자', 게다가 '매우' 바쁘다. 빨래 돌리고, 화분에 물 주고, 청소기 돌리고, 이불 두 채를 건조기 넣고 털고, 꺼내고, 다시 소파 위 먼지들을 잡아 내고, 집안 구석구석 걸레받이 위까지 먼지들을 훔쳐내고 나면, kbs 아침 클래식 fm의 진행자 목소리가 바뀐다. 두 시간이 지나갔다는 증거다. 요리를 정말 못하는 나는 토스트 하는데 일단 남들보다 세 배쯤 시간이 걸리고, 라면을 먹으려 차리는(!) 데는 보통 뚝딱뚝딱 15분만에 모든 것을 끝내는 남편보다 두 배의 시간이 더 걸린다. 친한 동생은 “언니는 부엌에만 들어가면 슬로비디오가 된다”라고 했을 정도니까. 집순이의 기본 적성인 집밥에 나는 소질이 없는 편이다. 매우 아쉽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좀 누워서 뭔가 해볼까를 열심히 궁리 중이다. 다음 주에 올 택배는 누워서 휴대폰을 볼 수 있는 거치대인데 책도 누워서 볼 수 있으니 허리도 안 아프고, 목도 안 아프고, 승모근에 힘도 안 줘도 되니 방송할 때 목소리와 자세가 생명인 나는 그야말로 굿 쇼핑이라며 오지도 않은 택배에 점수를 후하게 주면서 기대를 하고 있다. 오면 아주 본전 뽑게 잘 써줄 테다. 온 국민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가급적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던 때에 친한 후배와 톡을 주고받다 우리 모두 집순이가 체질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했다. 그도 나처럼 집에서 할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고 했다. 그는 미혼이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 주로 방에서 잠만 자고 나가는 하숙생처럼 지냈었는데 집에 있어보니 동생도 부모님도 챙길 것이 많다며 직접 요리한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요리를 직접 먹어보진 못했지만, 누군가 요리를 잘하면 몹시 부러운 마음에 존경심이 든다.) 그는 요리를 하며 집순이 체질을 단련시켜나갔고, 나는 글을 쓰며 노트북이 이기나 내 손 아니 엉덩이가 이기나 내기를 하며 버티는 시간을 보냈다.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아마 또 예쁜 카페에서 찍은 커피 옆의 타르트 사진, 아메리카노 옆의 핫초코 사진이나 찍으며 집 밖의 공간에 만족했을 것 같다. 외출을 자제하다 보니 어쩌다 한 번 들른 카페의 커피는 그렇게 무슨 의식처럼 찍었던 사진들 대신 향을 느끼고 맛을 느끼는데 집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찍어봐야 스마트 폰 용량만 또 차지하겠지.. 싶은 것을 그땐 왜 또 몰랐을까.. 인간은 참 뭘 모르는 존재다.

  사실 밖에서 일을 하거나 스케줄이 있는 날 나는 이른바 '강동동'이 된다. 그렇게 동동거리며 다니게 된 데는 굳이 동선에 맞춰 '지나는 김'에 할 일을 자꾸 끼워 넣어서인지도 모른다. 일단 집 밖을 나갈 때 내 손에 핸드백만 있고 다른 짐이 없는 날은 반드시 재활용 쓰레기라도 챙겨나가는 계획적인 인간인 편이다. ‘나가는 김’에 버려야 하니까. 빈 손으로 집 밖을 나설 때만큼은 꼭 나 스스로에게만 엄격한 기준을 세운다. (절대 남편에게 그런 방식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허허) 차로 이동하는 동선 내에 오늘 내가 다음 주에 해야 할 일들이 뭐가 있는지 보고 우체국에 들를 일이나, 서점에 들를 일을 꼭 하나씩 끼운다. 분명 약속은 하나인데 다니다 보면 동선이 3개, 4개 스폿으로 늘어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정말 힘들어지는 것을 아는데도 자꾸만 나간 김에 더 하게 되는 것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다.(다시 말해 고치고 싶다) 이렇다 보니 집순이로 있는 날은 또 집순이 모드에 엄청나게 열중한다. 집순이로 살지 않았던 그동안의 날들을 어떻게 그리 열심히 빠릿빠릿 다녔나 나 스스로 신기해하는 요즘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니 우리 집 베란다에 몇 시쯤 해가 어느 방향으로 들어 바닥에 사선 그림자를 만드는지 알게 되고, 그 사선 해 그림자 옆에 의자를 놓아두고 책을 펼치니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하고 크게 튼다. 꼭 그럴싸한 카페 같다. 물론 한 평뿐만 딱 그런 카페 놀이지만. 이내 건조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딴따다라라 딴딴 따다다 따다다 다다' 음이 들리기 전까지는 가능하다. 다음 건조기에 들어갈 세탁기가 또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가전제품이 다 같은 회사라 끝나는 음이 무슨 돌림노래 같다. 가끔은 빨래가 좀 젖어서 구겨진 채 세탁기 안에 있어도 바로 건조기로 옮기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딱 십 분만! 지금 좋은 햇살에 베란다에서 내 기분 좀 뽀송뽀송하게 만들고 가는 여유까지 부린다. 구겨진 옷은? 에이 몰라. 건조기가 펴주겠지 뭐. 삼 년 전 내가 요즘의 나를 봤으면 당장 손을 끌고 세탁기 앞으로 데려갔거나 시계를 보고 미리 세탁기 끝나기 1분 전에 세탁기 앞에 가서 허리에 손을 얹고 발을 까딱까딱 초를 세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과거의 나를 끌고 와서 소파에 반쯤 기대게 하고 싶다. 나 원래는 이렇게 집순이 스타일인데. 이게 적성인데. 그때는 왜 몰랐을까? 집에 익숙해지면 집이 사람을 변하게도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도 예전처럼 동동거리며 살지 못할 것 같다. 왜 나면, 난 집순이가 체질이니까.


지어진지 13년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요즘처럼 베란다 확장형이 아니다. 큰 방부터 거실을 거쳐 작은 방까지 통째 이어지는 긴 베란다고 있고, 대면형 주방으로 바꾼 뒷편에 작은 베란다가 하나 더 있다. 앞 베란다는 실내화를 신고 다니지 않도록 칸칸이 타일 매트를 깔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매트에서 느껴지는 까실까실한 촉감으로 깨고 싶어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베란다로 나간다. 외부와 만나는 베란다 창문은 옅은 보리차 색 블라인드가 내려져있다. 전날 티 팟에 내려 둔 차 한 잔 들고 햇살을 맞는다. 집밖순이였을 때는 차를 주로 타고 다녀서 비가 오나 안오나만 중요했는데, 아침마다 꼭 차 한 잔과 햇살맞이를 하다보니 비는 물론, 햇볕 좋은 날과 흐린 날의 미세한 차이도 중요해졌다. 구름이 잔뜩 끼어 햇살맞이를 못하는 아침은 좀 아쉽다. 보리차 색 블라인드, 그 틈으로 끼어들어 오는 햇살, 그리고 보리차 그리고 까슬까슬한 매트까지 네 박자가 고루 맞아야 완벽한 아침이 작곡되는데 말이다. 유튜브만 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스트레칭이나 요가도 해볼까 했는데, 한 평안에서 최대한 덜 움직이는 나무늘보처럼 그저 햇살맞이와 차 한 잔 목넘김으로 나만의 마음 스트레징을 한다. 집순이에게 땀나는 요가는 때로 과한 사치다. 후훗. 내일도 일교차는 크지만, 하늘은 맑다고 한다. 내일은 오랜만에 커피 내리고 햇살맞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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