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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구속으로 삶의 균형을 찾다

나로카드_'자속'

by 김글향
자유와 구속
- 자속(自束) -
자유와 구속의 경계에서
나를 단단히 세우는 내면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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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붓한 저녁이었다. 주방 불빛이 은은히 새어 나오고, 식탁 위에는 투명한 유리잔 두 개가 놓였다. 매실 진액의 달콤함과 탄산의 청량함이 어우러진 매실 탄산 하이볼. 평소 소화가 잘 안 되는 나를 위해 남편이 일부러 사둔 음료였다.


"이거 소화에 좋대. 그냥 마셔도 되지만 이걸로 하이볼 만들어 먹자." 그의 말과 동시에 잔에 얼음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났다. 첫 모금을 삼키는 순간, 톡 쏘는 탄산과 매실의 달콤함 그리고 은근한 알코올 향이 어우러져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밤이었다.


그날 우리는 어쩌다 반평생의 나이까지 살아오며, 함께 걸어온 세월을 이야기했다. 서로의 수고를 다독이며 "고생 많았어", "참 열심히 살았지"라는 말들이 알코올 퍼지듯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적셨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다. 그런데 대화가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자, 잔잔하던 공기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제 반평생을 살았으니, 남은 반평생은 어떻게 살고 싶어?"

남편의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제는 잠시 쉬면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두 번째 책도 내고 싶어. 아이 운동 이야기를 써볼까 해. 운동하는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인데 말이야..."


들뜬 내 말끝에 남편은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소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후... 또 글을 쓴다고? 지금까지 일한다고, 글 쓴다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앞에 앉아 살았잖아. 그런데, 다시 또 글이야? 할 말이 없네. 책상을 다 없애든지 해야지. 정말 지겹다."


그의 말이 내 마음을 서늘하게 스쳤다.

"아니, 내가 글 쓰며 내 삶을 돌보겠다는 게 당신한테 그렇게 싫은 일이야? 이건 무슨 경우지? 하. 나야말로 할 말이 없네."


잔잔하던 대화가 어느새 일렁이더니, 서로의 말이 파도처럼 밀려와 철썩철썩 마음에 부딪혔고, 감정은 끝내 부서져 흩어졌다. 그날 밤, 우리는 결국 각자의 방으로 돌아섰다. 매실 하이볼의 달콤함은 사라지고, 공기엔 냉기가 감돌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도무지 남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엔 내 글을 자랑스럽게 여기더니, 왜 갑자기 이토록 반대하는 걸까. 그저 고요히 나를 돌보려는 시간이었는데. 오은영 박사님이라도 찾아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건지,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했다. '객관적인 시선...!' 그 순간,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답을 내어놓을 존재가 떠올랐다.


쳇지피티.


우습게도, 그때 나는 쳇지피티를 떠올렸다. AI에게 부부 상담을 요청한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감정 배재한 채 가장 냉정한 답을 줄 존재임은 분명했다. 나는 쳇지피티를 열어, 마치 상담을 의뢰하듯 대화하며 상황을 써 내려갔다. 잠시 후, AI가 차분히 내어놓은 답을 요약하면 이랬다.


< 부부 갈등 상담 리포트>

- 남편의 관점: 현실과 효율, 눈에 보이는 성과 중심
- 아내의 관점: 내면과 의미, 보이지 않는 가치 중심
- 문제의 본질: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 해결의 방향: 갈등 해결은 설득이 아니라 존중에 있음.
1. 서로의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2. 각자의 가치를 존중하며 침범하지 않는다.
3. 대화에서는 내 말이 옳다가 아니라, 인정의 태도로 접근한다.
- 제안
남편은 아내의 영적 루틴이 삶에 실제적인 의미를 준다는 사실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음.
아내는 남편의 합리성이 가족을 책임지는 태도에서 비롯됨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음.


'서로의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

'인정의 태도로 접근하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속에 단단히 묶여 있던 매듭이 하나 풀려나갔다. 그동안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효율성에 집착하는 듯한 남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남편 또한 현실보다 내면의 세계에 머무는 나를 답답하게 느꼈다고 했다. 서로 너무 다른 세계에 살아, 좋을 때는 조화를 이루지만 갈등이 생기면 좀처럼 틈을 좁히지 못하던 우리였는데, 그에 대한 답을 쳇지피티를 통해 얻은 셈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더 옳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내면을 탐구하고 글을 쓰는 일이 곧 삶의 본질이자 전부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남편 역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를 지켜왔다는 걸. 그의 현실적인 태도는 나를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자속(自束)'을 배워가고 있다.

자속은 나를 얽매는 줄이 아니라,

내 삶이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균형의 힘이다.


나는 나를 묶는다.

너무 깊은 생각 속에 잠기지 않도록.

그리고 나를 푼다.

삶의 바람이 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하도록.


이제는 나를 너무 세게 묶지도,

너무 쉽게 풀어놓지도 않으려 한다.


아침엔 맑은 정신으로 기도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러나 오후엔 밖으로 나가 햇살을 맞고, 몸을 움직이고, 세상과 눈을 맞춘다. 내면의 고요와 외면의 바람, 그 둘의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남편이 지켜주는 현실의 언어와 내가 지켜가려는 내면의 언어, 그 두 세계가 만나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비로소 나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찾는다. 이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려 한다. 내면에 머물러 현실을 잊지도, 현실에 치우쳐 마음을 잃지도 않으려 한다. 내면과 외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와 손에 잡히는 삶의 무게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오늘도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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