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카드_'실대'
기다림과 실천
- 실대(實待) -
매일 작은 실천을 쌓아가며
기다림 속에서 결실을 만들어가는 과정
요즘 나는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자주 곱씹는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건,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길 바라며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
나는 지금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 삶의 방향, 나의 사명, 그리고 사랑과 나눔의 방식까지. 오랫동안 익숙했던 일을 내려놓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요즘이다. 어떤 날은 벅찬 설렘으로, 또 어떤 날은 막막한 두려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조차 지금의 나를 배우는 과정이라 믿는다. 답은 어느 날 문득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실천'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으면 가장 먼저 기도 노트를 펼친다. 김이 살짝 오른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이 종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그 빛을 따라 손끝이 움직이고, 오늘의 마음이 문장으로 스며든다. 기도는 내게 결심이자 점검이다. 어제의 흔들림을 털어내고, 오늘의 중심을 세우는 시간. 가끔은 막연한 두려움이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번져오지만, 그 감정마저 나를 정직하게 마주하게 만든다. 이 불안정한 시기가 막막함이 아닌 배움의 시간이 되길 바라며, 나는 그렇게 하루의 첫 장을 연다.
기도를 마친 뒤에는 모닝편지를 쓴다. 2년 넘게 이어져 온 나만의 루틴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룹 채팅방에 매일 아침 편지를 올린다. 책을 펼쳐 마음에 닿은 문장을 옮겨 적고, 그 문장이 오늘의 나에게 어떤 울림으로 다가오는지를 천천히 풀어쓴다. 어제는 이런 문장을 적었다.
내 마음의 온도가 내 글의 온도를 결정하고 내 삶의 태도가 내 글의 깊이를 결정한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글과 하나가 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삶이 그대로 글이 되고, 글이 그대로 삶이 되는 인생은 어떤 세상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 김종원, <청춘의 필사>
삶과 글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나의 하루가 한 편의 문장이 되는 그런 하루. 모닝편지는 단순히 책 속의 한 구절을 옮기는 행위가 아니다. 그 문장을 통로 삼아 나의 하루를 돌아보고, 지금의 나를 언어로 정리하는 사색의 시간이다. 누군가는 그 글을 읽으며 자신을 비추고, 나는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 나를 다시 배우게 된다. 그렇게 매일 아침, 한 문장이 또 다른 삶을 깨우고 이어준다. 모닝편지는 함께 글을 쓰는 이들에게 전하는 인사이자, 결국엔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 시간은 내면의 목소리를 언어로 건져 올리고, 생각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내는 고요한 사색의 의식이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밖으로 나간다. 햇살은 계절의 냄새를 품으며 내리쬐고, 바람은 머리칼 사이를 스치며 마음속 먼지를 털어낸다. 도시의 소음과 내면의 소음이 뒤섞인 길 위를 천천히 걷는다. 발걸음마다 생각이 부서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얽혀 있던 마음의 매듭이 조금씩 느슨해진다. 걷는다는 건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사색의 형태로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다. 흩어졌던 마음이 걷는 리듬에 맞춰 다시 모이고, 미세하게 흔들리던 감정들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 자리에 조용한 확신이 자란다.
이렇게 하루를 채우는 세 가지 루틴. 기도, 글쓰기, 산책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세 줄기 숨결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이 기다림 속에서 하루하루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깊어지고 있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실대(實待)'란 기다림을 살아내는 법이다.
기다림은 견디는 일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작게라도 살아내는 일이다. 기도로 묻고, 글로 정리하고, 걸으며 사색하는 하루. 그 반복이 결국 내가 찾아가야 할 길로 나를 인도할 것이다.
오늘도 조용히 묻는다.
'이 기다림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을까?'
그리고 잠시 미소 짓는다. 답은 몰라도 괜찮다.
나는 지금, 그 답을 향해 걷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