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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하기 Jul 30. 2024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을 것

천재와 광대, 빛과 그림자, 사랑과 증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어색함도 잠시, 시간이 촉박한 우리는 서둘러 티켓박스로 향했다.

예매내역을 보여주고 티켓으로 바꾼 뒤 전시실로 이동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얼마 전 가입한 독서모임에서 알게된 이들과 마음이 맞아 충동적으로 온 전시였다.

이름도 생소한 작가다. 

그래서 전혀 기대도 하지 않은 채 전시실로 들어섰다.


'사진촬영금지'


아.. 아쉽네.



두 여자가 있는 '광녀'가 광대시리즈지만, 나는 '붉은머리'가 좋다.



처음 눈에 들어온 그림은 왠 말린 생선이 희뿌옇게 그려진 정물화였다. 

전체적으로 전시실을 둘러보니 그림의 색이 명확히 달랐다.


어떤 그림은 선명한 유채색들로 윤기가 돌 정도로 물감을 듬뿍 사용했다.

어떤 그림은 주로 베이지나 그레이처럼 무채색을 사용하며 캔버스 질감이 다 보일정도로 물감을 적게 사용했다.

어떤 그림은 사물의 검은 테두리가 선명했고, 

어떤 그림은 테두리마저 갈색으로 희미했다. 


다행히 도슨트 시간에 맞췄기에 설명을 더해 들을 수 있었다.


색이 흐린 그림들은 대체로 1940년대 그려진 그림으로, 그가 가난하고 불우할 때 물감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린 그림이란다. 동료들이 쓰고 남은, 인기 없는 물감들로만 그렸기에 색감이 그러하다고. 흐린 그림들 중에는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양면으로 그렸거나, 캔버스에 커피 얼룩이 남아 있는 그림도 있다. 

색이 선명한 그림들은 대체로 1950년 이후 그려진 그림으로, 그가 인정받고 유명해 진 뒤 물감을 듬뿍 사용한 그림이었다. 


40년대와 50년대, 그가 10대~20대 시절 그림은 거칠었다. 

얼마나 표현하고 싶은 색들이 많았을까?

하지만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 그는 분노했고, 그 울분을 고스란히 그림에 남겼다.

붓의 모가 아닌, 뒷부분으로 그림을 긁어내듯 표현하기도 했고, 거친 선이 난무하기도 한다. 

스케치 선처럼 자잘한 선들이 난무하기도 한다. 

선으로 색으로 그는 자신의 감정들을 표출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뭔가 절제하고 억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검은 선이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단정하게 색을 가둬두는 것 같은 검은 선이 있고, 그마저도 이리저리 덧칠해진 물감덕에 울퉁불퉁한 선이 있다. 


그는 다작으로도 유명하다. 

하루 10시간씩 그림을 그려 당대 다른 화가들과 비교해도 월등히 많은 수인 80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릴수가 있지?





피카소가 질투하고, 크리스찬 디올이 사랑했던 화가. 

(피카소의 아들이 식당에서 사인 요청을 하자, 피카소가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함께 활동했던 피카소나 달리보다 덜 유명했던 화가. 

천재라 불렸으나 광대가 되길 자처한 화가. 

그림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표현했던 화가. 

서명조차 디자인처럼 예술적이었던 화가.


그의 이름은 베르나르 뷔페였다.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그는, 파킨슨 병 진단을 받고도 25점의 그림을 더 그려냈으며, 결국 1999년 평화로운 일상을 마친 어느날 자신의 작업실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그의 아들에게 촬영하라 말해 남겨진 70세 그는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고 겨우 그림을 이어갔다.

그 영상을 한참 들여다 봤다.


대체로 정적인 그의 그림에는 파도나 바람이 잘 느껴지지 않지만, 마지막 그림 속에는 휘몰아치는 파도가 돌에 부딪혀 부서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해 종종 그렸다는 그 해변에서 그는 무슨생각을 했을까?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다양한 그림을 남겼지만,

나는 그의 그림 중 '광대' 시리즈가 좋았다. 

마치 그의 자화상 같아 보였다. 


꽤 잘생긴 얼굴을 가졌지만, 자화상 속 그는 늘 깡마르고 볼이 움푹 패인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도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 광대가 된 것이다. 


천재였지만 광대화가. 

대중은 그의 그림에 열광했고, 그의 화려한 삶을 비난했다. 

커다란 성에 살고 고급 차를 소유한 그가 서민의 삶을 그리는 것을 모순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뮤즈라 여기는 사람을 만나 사랑했고, 행복했지만,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현실에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는 

마지막 그 날, 아내와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작업실로 향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그림은 주제나 화풍이 다채로워 볼 거리가 많았다.

성공하기 전과 후로 나눠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그림에서는 감정이 느껴져서 좋았다.


어떤 그림에서는 거칠게 긁어내거나 덧댄 자국이 있고, 

어떤 그림에서는 부드럽게 선을 이어가고 색을 덧댄 자국이 있다.

무표정의, 텅빈 눈동자의 인물들을 그렸지만 그 안에 그가 하고 싶은 말들이 가득했다.


"나를 둘러싼 증오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훌륭한 선물이다"


대중의 미움과 비난을 선물이라 받아들인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에게 열광하던 대중들이 등을 돌렸을 때 그는 절망했을까?


얼핏보면 어린시절 잠시 불우했으나 결국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 그였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다른 것이 부러웠다. 


그림이라는 매개가 있는 그가 부러웠다.

가난과 부모의 죽음, 전쟁을 겪으면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세상이 그의 그림에 환호할 때도 그는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도 그는 죽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당시 그의 상황과 감정, 생각이 담겨져 있다. 

도슨트의 설명이 끝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모든 그림들을 다시 살펴봐도 빠져들게 된다. 

볼때마다 그림이 하는 이야기가 다르게 들린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매개가 있음이 부러웠다. 

평생을 몰두할 무언가를 찾은 그가 부러웠다. 


내겐 무엇이 있지?


나 역시 수 많은 상황에 놓이고, 그 때마다 감정과 생각들이 쏟아진다. 

나는 이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지?

담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린다.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내고, 표현할 것은 표현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 안의 감정과 생각과 마주해야 한다. 

피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하..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내겐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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