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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Nov 06. 2019

인간관계의 정점, 회식

9급은 정말 여섯 시에 퇴근하는가

회식의 중요함

알고 있겠지만, 한국의 직장에서 회식은 중요하다. 이만저만 중요한 게 아니다. 인사 이동한 직원 환영과 환송, 퇴직자 환송, 큰 행사를 마무리한 뒤의 격려와 같이 공식적인 사안이 명분이다. 그래서 정부 조직의 회식에는 의전이 있다. 이 회식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밝히고 이에 대해 덕담하는 보스의 인사말로 회식이 시작된다. 명분이 확실하면서도 아름답기 때문에 회식에 참여하지 않는 직원에게는 ‘이 공식적인 명분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거?’ 하는 눈총을 날리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하급 직원들일수록 회식 자리에 앉아 있는 일이 힘들다. 여러분이 회식의 주인공이라면 인사말과 건배사를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 술 좋아하고 화제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회식이 즐거운 자리가 되겠지만, 평범한 9급 공채생 가운데 회식을 주무대로 삼는 ‘인싸’가 몇이나 있을까.


회식이 인간관계의 정점이라니,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회식은 분명 인간의 칠정(七情),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싫어하고 탐하는 마음이 그야말로 넘치고 또 넘쳐 나는 삶의 현장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마음을 크게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회식에 참석하는 것을 힘겨워하는 9급 공채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까.


첫째,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필히 참석하길 권한다. 여러분이 그날 회식―환영회나 환송회―의 주인공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모든 샐러리맨들은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자신이 아프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급한 일이 있다면 불참해도 관계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회식 자리를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그 자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참석하지 않는다면, 조직원들이 여러분을 오해할 수 있다. ‘쟤는 우리가 싫은가 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쟤는 앞으로 부르지 마. 우리도 아쉬울 것 없어.’ 하는 감정적인 반응에까지 이를 수 있다. 회사 생활하면서 굳이 그런 파탄에까지 이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둘째, 회식 자리에서 할 말이 없다면 조직원들의 말만 들어도 좋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저녁 식사만 하고 온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하면 된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상사들의 옛날 얘기가 힘들 수 있겠지만,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사람의 색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 이것을 회식의 포인트로 삼으면 회식이 덜 지루할 수 있다. 또한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회식 중에, 회식 자리 앞에 앉은 고참의 중학생 아들이 국내는 물론 외국의 로봇 경진대회에도 나가서 상을 받아 오는 영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얘기를 듣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회식 중에 강다니엘의 사진이 새겨진 신용카드를 보여준 동료가 있었다. 카드는 만들었지만, 그의 얼굴이 긁힐까 봐 카드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나로서는 이 역시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회사가 회식을 하는 이유는 공식적인 명분과 함께, 조직원 모두가 다들 친하게 잘 지내보자는 의도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호의를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직원들이 마음을 모아 열심히 일해서 높은 성과를 이루었다면 간부는 이를 격려하는 것이 마땅하다.


안다. 그런 건 다 됐으니, 회식 안 하는 게 실무자를 돕는 일이라는 것을. 군대 조직처럼 상명하복의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추기 위해 회식 자리를 만들 때도 있고, 부서장이 젊은 직원들과 술 마시고 싶어서 회식 자리를 만들 때도 있음을. 조직원 모두가 친하게 잘 지내야 한다는 것도 전체주의적인 발상일 수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직장 문화에서 회식은 안 없어질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배를 채우는 목적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마주치면서 ‘언제 저녁 한 번 먹자’고 인사하는 것이 끼니를 때우자는 의미겠는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서로의 안부를 묻고, 미뤘던 이야기도 나누자는 뜻 아니겠는가.


가끔은 주최측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회식이 흘러가서, 구성원 간 갈등이 표면화되는 경우도 있다. 아주 많다. 말싸움도 종종 발생하고, 몸싸움도 가끔 일어난다. 그래도 회식은 안 없어질 것이다.


다행히 최근 정부 조직뿐 아니라 한국 모든 직장의 회식이 간소화되어 가고 있다. 회식 횟수 자체가 줄어들었고, 1차에서 모든 행사를 마치고 2차 이상은 원하는 사람만 가는 분위기다. 1차 삼겹살에 소주, 2차 호프집, 3차 노래방, 4차 포장마차로 이어지던 전통적인 회식 프로세스는, 이제 정부 조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회식 도중 빠져 나갈 타이밍

지금까지는 회식에 대해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지금부터는 테크니컬한 정보를 제공하겠다. 꼰대가 싫어서든, 동료가 싫어서든, 회사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서든, 회식 장소와 메뉴가 마음에 안 들어서든, 회식 후 피치 못할 스케줄 때문이든 회식 참석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분석적으로 사고해 보자.


회식 참석 시간을 가장 최소화할 수 있는 0순위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아프거나 가족이 아프거나 급한 일이 있다면 불참해도 관계없다. 자신의 건강관리를 잘하는 것은 조직에 기여하는 일이다(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 생각이 정부 조직 관리자들의 생각과 일치하는지는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 1순위는 회식의 명분을 밝히는 공식 행사까지만 참석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것이다. ‘피치 못할 사연으로 도중에 일어서기는 하지만, 나는 이 공식적인 자리의 명분에 공감하는 자세를 갖춘 조직원’이라는 의사를 표명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료들에게 조용히 인사하고 자리를 뜨면 된다. 이 정도 대사가 자연스러운 것 같다. “저 먼저 일어설게요. 오늘 원래 다른 일정이 있었거든요. 서무주임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이때 시각은 회식 시작 +20M.


2순위는 공식 행사가 끝난 뒤, 먹고 마시고 삼삼오오 웃고 떠드는 시간에 자리를 일어서는 것이다. 한참 분위기가 올라오는 타이밍이어서 자리를 뜨더라도 크게 주목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굿 타이밍이다. 역시나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료들에게 조용히 인사하고 자리를 뜨면 된다. “저 먼저 일어설게요. 오늘 원래 다른 일정이 있었거든요. 서무주임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이때 시각은 회식 시작 +50M.



3순위는 조직원과 1차를 다 즐긴 다음, ‘갈 사람 가고, 남을 사람 남는’ 타이밍에 집에 가는 것이다. 역시나 굿 타이밍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 타이밍이 제일 바람직할 것 같다. 공식 행사와 식사로 구성된 1차를 마무리하고 귀가한다는 점에서도 좋고, 별다른 대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도 좋다. ‘귀가’라는 행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들이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이때 시각은 회식 시작 +1.5H.


4순위는 2차에 참석한 뒤, 역시나 분위기가 한참 올라올 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다. 역시나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동료들에게 조용히 인사하고 자리를 뜨면 된다. 이 정도 대사가 적당한 것 같다. “저 먼저 일어설게요. 더 있으면 내일 제때 출근 못할 것 같아요.” 이러면 ‘내일 연가 쓰고 더 있다 가라’고 하는 고참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냥 하는 말이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띄우면서 일어서면 된다.


이때 회식에 불참하거나 도중에 일어설 수밖에 없는 여러분의 사연을 ‘사전에(!)’ 알리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래야 나중에 엉뚱한 얘기를 듣지 않는다. 1차 회식이 마무리될 때까지 참석할 경우에는, 즉 3순위와 4순위의 경우에는 미리 알릴 필요가 없다. 0순위, 1순위, 2순위의 경우에는 미리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조직원에게 미리 알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긴 하지만, 여러분의 회식 참석을 궁금해하지 않는 조직원에게 빠짐없이 이 일을 알리는 것도 오지랖 넓은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추천하는 알림 대상자는 사무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 서무주임, 팀의 선임, 팀장, 부서장이다.


만약 간부에게 알리기가 부담스럽다면 적어도 서무주임에게는 반드시 알려야 한다. 2장 ‘신참 공무원이 하는 일’에서 서무주임이라는 직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여러분이 소속되어 있는 부서의 인사 담당자이자 살림꾼이다. 간부와 직원 간 가교 역할을 한다.


회식 자리에 여러분이 보이지 않으면 부서장은 서무주임에게 물어볼 것이다. 걔는 안 왔냐고. 이때 서무주임과 사이가 좋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서무주임에게 자신이 불참할 수밖에 없는 사연과 안타까움을 충분히 전달한 사람이라면, 서무주임이 여러분을 대신해서, 여러분의 사연을, 부서장에게 잘 전달해 줄 것이다.


여러분이 회식 도중에 조용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을 때에도 부서장은 서무주임에게 물어볼 것이다. 걔는 어디 갔어? 아까는 있었던 것 같은데. 회식 날짜 잡기 전부터 오늘 원래 다른 일정이 있었대요. 제가 저녁만 먹고 가라고 했어요. 대화가 이렇게 풀리는 것이 부드럽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2부에서는 ‘조직 적응이 우선’이라는 제목으로 정부 조직의 직장문화, 조직 안에서 여러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고참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살펴봤다. 기성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해 왔던 여러분으로서는 정부 조직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완고함과 폭력성이 무척이나 낯설 것이다. 게다가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정부 조직에서는 기본적인 예의와 공손한 태도만 갖추고 있어도 무방하다. 억지로 상관에게 절대 복종할 필요는 없다. 그 선택은 더 힘든 삶으로 이어진다. ‘나는 당신을 인격체로서 존중합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라는 신호를 줄 수 있는 정중한 인사만으로도 여러분의 평판은 충분히 좋게 형성될 것이다. 인사만 잘해도 성공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조직에 적응하고 고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여러분의 실질적인 공직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적어도 한국 정부 조직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조직 적응이 우선’이라고까지 말하고, 이를 직무보다 먼저 살펴본 것이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인간관계보다 중요한 것이 일이다. 여러분의 공식적인 임무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지 조직원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다. 3부에서 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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