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철원 Nov 17. 2019

공직자로서의 삶과 나 자신으로서의 삶

9급은 정말 여섯 시에 퇴근하는가

아무리 고용 안정을 중요시한다 해도 이 직업을 선택한 여러분에게 공직자로서의 사명감이 없을 리 없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쌀과 구호품을 전달받는 복지 대상자가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에게 고마움을 표한다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아무 때나 쉽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여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공직자로서의 삶과 나 자신으로서의 삶이 일치하거나 조화롭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팍팍한 현실을 받아들이되 우리의 목소리를 내자

1부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우리의 현실은 팍팍하다. 공직 입문 전에 월급이 제때 지급되지 않았던 회사에서 일했던 나 같은 사람은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9급 공채생들이 9급 1호봉의 보수에 큰 충격을 받는다. 강한 위계질서, 상관의 말에 신참이 토 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조직문화는 후진적이고 갑갑하다. 시민들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날카롭고, 일부 특별한 고객은 범죄 수준의 폭력성을 보이고 있다. 꽃길은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지뢰밭이다.


우선은 이 팍팍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 시대에 이 직업을 선택했다면 그에 대한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우선은 조직에 무난하게 적응하고, 업무 능력을 높이고,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이 필요하다.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공직자로서든 노동자로서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다.


팍팍한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말을 부조리한 일에 순응하자는 말로 오해하는 독자가 없기를 바란다. 당연하게도, 불법과 범죄, 부정한 지시와 청탁, 여러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무례함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부조리함을 개선하고 싶다면 의연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나와 여러분을 포함한 다수의 공채생들에게는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 만한 힘과 세력, 의지와 전투력이 부족하다. 신참 조직원이 자신의 주장을 펼쳐 전 조직원의 주목을 받는 것도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 조직 안과 밖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의미 있는 사회적 행동으로서, 나는 노동조합 가입을 여러분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나 역시 노동조합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마 모든 이들이 노동조합의 활동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고정적으로 형성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고, 시위하는 활동 같은 것 말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나도 내가 노동조합 가입을 권유하는 조합원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만큼 이 조직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야만성과 폭력성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와 여러분 같은 하급 공채생들이 바라는 바가 뭐 그렇게 거창할 것 같지도 않다. 공익과 고용 안정성을 해칠 만한 불법적인 지시를 받지 않는 것, 인격 모독과 무례한 처우를 당하지 않는 것, 비효율적인 야근과 휴일 근무에 동원되지 않는 것, 특별한 민원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 그리고 범죄 수준의 특별한 민원에 대한 단호한 법적 대응. 이 정도가 아닐까. 가해자가 스스로의 행동을 성찰해서 개선해 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당연한 처우 역시 우리가 목소리를 낼 때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혼자 목소리를 내는 일이 쑥스럽다면 노동조합에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조합원과 함께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자. “What is your name? Speak yourself.” 방탄소년단이 2018년 9월 UN에서 한 연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부조리한 일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펼쳐진 환경이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예의를 갖춰 동료, 고참, 관리자, 그리고 민원인을 대하면서 여러분만의 자유를 찾자.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정시 퇴근하자는 말이다. 임무를 완수하지 않고 민원인의 궁금한 점을 풀어 주지 못한 채 정시에 퇴근하는 것을 자유라고 볼 수는 없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의 미래

지금은 하급 공채생이지만, 여러분도 이제 곧 인사 이동으로 부서를 옮기고, 여러 임무를 거치며 경력을 쌓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른 시점에 갑자기 후배를 맞이하고, 어느 날 갑자기 승진 후보자가 될 것이며, 조직에서 쓴맛 단맛을 두루 맛보다가, 너무나 허무하게도 고참이 될 것이다. 그렇게 허탈하게 고참이 되기 전에 이 조직의 삶 또는 여러분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지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가꿔 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백 세 시대가 도래했다. 서른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예순까지 일터에서 일하고, 퇴직한 뒤 특별한 일 없이 일흔이나 여든까지 살다가 생을 마감하던 시절과는, 아주 많이 다른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무엇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어두워질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높은 책임성, 투명성, 전문성, 봉사심을 요구받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퇴직 후 받게 될 연금은 현재 수준보다 더 줄어들 것이 확실하다.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은 현행 제도의 틀을 유지하면서 기여율과 지급률을 조정함으로써 ‘더 내고 덜 받는’ 모수 조정안으로 귀결되었다.*1 하지만 한창 개혁안을 논의했을 당시에는 공무원연금이 지닌 직역연금으로서의 성격을 폐지하고 국민연금과 동일하게 설계하는 방안, 국민연금으로 통합 이후 별도의 직역연금을 구성하는 방안과 같이 제도의 틀을 바꾸는 구조 개혁안이 논의되기도 했다.*2 모수 조정안이든, 구조 개혁안이든 공무원연금은 현재 수준보다 더 줄어드는 방향으로 개혁될 것임에 틀림없다.


‘공정’을 중요한 사회 정의 덕목으로 받아들이는 현 시점에서 공채 제도는 많은 청년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인재 채용 제도다. 하지만 이 제도는 장점뿐 아니라 적지 않은 단점을 노출하고 있다.


‘당선, 합격, 계급’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가 부제다. 문학 공모전과 공채 제도를 소재로, 한국적 맥락에서 이 제도의 유래, 의의,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논한, 매우 특별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공채 시스템의 원조인 과거(科擧) 제도를 분석하면서, 그 폐해로 첫째, 사회적 낭비가 심했다는 점, 둘째, 정작 필요한 인재는 뽑지 못했다는 점, 셋째,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공채 제도는 ‘또라이’를 걸러 내고, 조직에서 사고 안 치고 주위 사람들과 잘 융화하며 위에서 시키는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는 ‘성실한’ 사람들을 찾는 기능을 하게 된다.*3 지금의 공채 제도의 한계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업무 분야에서 전문가를 양성하는 전문관 제도, 정부와 민간기업의 인재가 서로 자유롭게 교류하는 인사 제도가 새로운 인사 방향으로 제시되곤 한다.


물론 일반행정직이 주류를 이루는 정부 조직의 관성을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채용 과정에서의 ‘공정’을 정부 조직 인사의 큰 매력으로 인식하는 청년과 구직자들로서는 이 방향이 반갑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인에게 공채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이 방식이 공정하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스펙, 외모, 경력, 집안 재산을 따지지 않는 이 채용 방식은 젊은 시절 잠깐 방황했다가 제 길로 접어든 이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경로다.


이런 맥락에서 공무원 채용 제도가 어떻게 변화할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업무에 전문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부 조직의 인사 제도가 변화할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이 조직 안에서 나름 재무․회계․예산 분야의 전문가라고 자부해 왔는데, 어느 날 회계사가 6급 특채로 재무과에 배치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 펼쳐질 것이다.


주특기와 필살기를 만들자

어느 날 허무하게 고참이 된다고 했다. 도무지 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과 조직에 매몰되면 순식간에 고참이 된다. 여러분이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생각했던 그 고참 말이다. 부서를 다섯 번 정도 이동하고 나서 어느 날 10호봉 고참이 되었다고 해 보자. 1호봉 시절보다는 보수가 높아지고, 신참으로서 갖게 되는 부담은 혁신적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부 조직에서의 10년 경력이 여러분에게 과연 무엇을 남겨 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워드 실력, 엑셀 실력, 파워포인트 실력, 문서 작성 실력, 모두 어느 정도는 향상되었겠지만, 그 어느 것도 획기적으로 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실력은 본질적인 내공이라기보다는 스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고용 안정성에 만족한 나머지 자신의 주특기와 필살기를 개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신참 시절에 좋게 보지 않았던 조직문화에 익숙해진 스스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사람을 대함에 있어 예의를 다하지 않았다면 좋지 않은 평판이 형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분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이 조직에서 어떤 인재가 될 것인지, 그리고 이 조직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벌써? 너무 이르지 않나? 이제 막 공무원이 됐는데?’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고참이 된다. 조직과 일에 적응하고, 회식에 참석하고, 퇴근 후에 쇼핑하고,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느라 못 만났던 사람들과 만나고,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애 기르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기왕에 일을 한다면 그 업무에 정통한 ‘통(通)’이 되길 권한다. 여러분에게 이익이 된다. 현재 자신에게 의무로 주어진 일도 열심히 하되, 경력이 붙으면 여러분의 관심사를 고민해 보길 권한다. 인사․조직, 재무․회계․예산, 홍보, 문화․관광, 통계, 주민등록․인감․가족관계등록,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노인복지, 장애인복지, 여성복지, 아동복지, 건축․도시계획, 스마트시티…….


‘나는 이 분야에서 통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경력을 잘 관리해서 조직 안에서 인재가 되길 바란다. 그 업무의 관련 규정을 통달하고, 경력과 전문성을 쌓고, 사람들과의 소통에까지 노하우가 쌓인다면 그 누구도 여러분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경력을 쌓게 된다면 일하면서도 공무원교육원이나 인재개발원에서 돈을 받으면서 강사로 활동할 수도 있다. 여러분이 원하는 분야에서 인재가 된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큰 행운이다.


최근에는 전통적으로 주요부서라 여겨지는 총무, 인사, 감사, 기획 부서의 인기가 예전보다 못한 것 같다. 이들 부서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사생활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전문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부서이기도 하다. 이는 90년대생 신참 공채생들에게 매력적인 조건이 아니다(정말이지 90년대생들은 영민하다. 나는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불합리한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 영민한 90년대생 동료들을 좋아한다). 나를 포함한 앞선 세대의 조직원들은 이들 부서의 명성만을 바라본 나머지, 사생활도 없고 전문성을 쌓기도 어려운 부서를 선호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선택인가. 중앙정부 공무원 저자가 쓴 ‘그놈의 소속감’이라는 책에는 신참 고급 관료들의 이같이 현명한 성향이 소개되어 있다.


법제처와 같이 업무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에 대한 선호가 특히 높다. 윗사람에게 사소한 일로 시달리고, 쓸데없는 의전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자기 할 일만 충실히 하면 되는 조직을, 젊은 공무원들이 원하고 있다.*4


나는 이 조직에서 재무․회계․예산통(通)이 되고 싶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유력자의 입김으로 고유 업무가 쉽게 흔들리고, 그들로부터 고유 업무가 가볍게 여겨지는 것을 보면서, 혼자 생각해 본 조직 안에서의 진로였다. 게다가 공무원 일을 그만두는 그때까지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업무다. 이 업무에 통달하면 비효율적인 일에 동원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졌고, 익숙하지 않은 기본 개념을 잘 정리해서 조직원들과 공유한다면 나도 좋고 조직원도 좋고 조직에도 기여할 수 있겠다는 사해동포적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식 노동, 육체 노동, 감정 노동 등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노동력을 충분히 갖고 있었던 젊은 남자 직원에게 이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지금은 거의 포기했고, 복지 분야를 다음 전공으로 고려하고 있다. 잘될지 모르겠다. 나는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여러분은 직장 안에서 원하는 전공을 선택해서 전문가 수준의 직장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개인, 다른 조직원, 조직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미 어느 정도 통달해 있는 자신의 업무 경력에 자격증을 추가해서 퇴직 후 새로운 인생 경로를 탐색하는 공무원도 있다. 고용노동부 공무원의 노무사 자격증 취득, 세무직 공무원의 세무사 자격증 취득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업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더라도 외국어에 통달한다면 여러분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영어는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프랑스어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어는 남미 대륙에서 써먹을 수 있다. 변호사, 노무사, 회계사, 세무사 자격증이 쉬운 자격증은 아니지만, 뜻을 세운다면 여러분이 도전하지 못할 자격증은 아니다. 이러한 전공으로 조직 내에서는 물론 정부 조직 밖에서도 특기를 발휘할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아주 좋을 것 같다.


주특기와 필살기로 조직 밖에서도 성공하자

이쯤 되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지금껏 힘들게 공부해서 여기 간신히 들어왔는데, 또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라고?’


이렇게 답해 주고 싶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던 공부와 노력은 의외로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국어․영어․수학으로 대표되는 고등학교 시절의 공부에서 우리의 선택권은 딱히 없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 전공을 선택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적성과 전공의 미래 전망을 피상적으로 고려할 뿐이다. 마침내 9급 공시생을 선택했지만, 이 길이 우리가 주도적으로 선택한 것이었나? 이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입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이곳 정부 조직에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패턴과는 사뭇 다르게, 이제 진정으로 여러분이 선택해서 여러분의 삶을 설계해 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좀 이른 것 아닌가’ 생각되는 지금부터.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라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더 깊게 하면서도 경제적으로도 이익이 되도록, 개인에게 이익이 되면서도 조직과 사회에도 이익이 되도록 주특기와 필살기와 진로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백 세 시대에 필요한 고민이기도 하다.


월급을 받고 있으니, 현재 여러분의 입장이 당장 생계유지를 걱정해야 할 형편은 아니다. 안정된 직장을 가져 금전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느 정도는 안정된 현재 상태에서, 여전히 젊은, 20대와 30대의 유리한 연령대에서 여러분의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여러분의 직업능력 향상, 인적 자본 향상은 여러분에게도 조직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준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정부 조직원으로서의 목표와 나 자신으로서의 목표를 가급적 동일하게 만들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주특기와 필살기를 갖추게 될 때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내가 하는 일 외에, 조직 바깥에 ‘더 큰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분이 조직에서 느꼈던 그 끔찍한 고통이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찻잔 밖으로 나오면 거칠게 몰아치던 태풍도 실바람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5 따라서 정부 조직 안에서 다방면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공채생일수록 더 큰 공동체를 바라봐야 한다. 이 세상에 관계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이 상사나 조직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백하건대 정작 나 자신도 입직 후에 여러분에게 권한 방식으로 내 미래를 내가 주도해서 설계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의 권유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어문 계열의 문과대학을 졸업한 뒤 공무원이 된 나로서는 사회과학적 소양이 많이 부족했다. 행정학, 행정법 모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처음 접했다. 행정학을 새로운 전공으로 선택해서 주경야독의 길을 걸었다. 정부 조직 안과 밖에서 성공하겠다는 야심은 없었다. 그저 부족한 실력을 갖추자는 생각이었다.


대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야근을 많이 못하니까 더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생각을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대학원 다니더니 겉멋 들어서 저러나 봐.’ 하는 엉뚱한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업무가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일과 학업 모두 큰 문제 없이 균형을 잡아 나갔다고 생각한다.


3년 동안 대학원 수업을 들었고, 1년 동안 학위논문을 썼다. 이 4년 동안 학술지 논문을 세 편 썼다. 공무원의 책임성에 관한 논문 한 편, 근로빈곤(working poor)에 관한 논문 한 편, 노인일자리사업에 관한 논문 한 편이었다. 학위논문은 노인 빈곤을 주제로 썼다. 졸업 후 학위논문 일부를 수정․보완해서 학술지 논문을 한 편 더 썼다. 수업을 들으면서 연구 방법론과 다양한 통계 분석 방법론을 배웠고, 구조방정식, 의사결정나무모형 분석, 군집분석, 현상학적 방법을 활용해서 이 논문들을 작성해 나갔다.


정책학, 정책분석론, 재정학, 공공선택론과 같은 이론 과목은 정부 조직에서 일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연구조사방법론, 행정계량분석, 빅데이터 정책분석론과 같은 과목은 실무자가 실제로 조사를 실시할 때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지식과 기술을 제공해 주는 과목이다.


하지만 내가 소속된 조직에서 내가 연마한 기술을 활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다. 정부 조직에서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에 아쉬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괜찮다. 지금 당장 쓸 곳은 없더라도 언젠가는 활용할 때가 있을 것이다. 또한 필요하다면 정부 조직 바깥에서도 쓸 수 있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서도, 영어 번역에 관심을 갖고 있다. 생계유지가 가능할 정도로 번역을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번역 일을 하는 데에도 사회과학을 전공한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조직에서 재무․회계․예산통이 되고 싶다는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복지 부서에서 경력을 쌓아 그 분야에 통달한 실무자가 된다면 이 또한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리라 생각한다. 최근에 이에 대해 동료 사회복지직 직원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 복지 부서 근무는 괜찮지만 절대 사회복지직으로 직을 옮기지는 말라는 조언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이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 왔던 일―구청장이 원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일, 동 주민센터 뒷다이 일―보다는 더 전문성을 높이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퇴직을 생각하는 공채생이라면

첫 장 ‘생각보다 힘들잖아’에서 만약 퇴직을 결심했다면 이 장을 읽어보라고 했다. 나 역시 입직 3년 차 시절, 모시기 힘든 팀장을 만나 퇴직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여러분의 고통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에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상황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면 퇴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공무원이 이 시대에 아무리 좋은 직업이라 해도 내가 싫다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그 편한 공무원 일이 힘들면 다른 일은 어떻게 하냐?”는 폭력적인 말에 흔들리지 말고, 여러분의 주특기와 필살기가 무엇인지, 나 자신이 어떤 성격과 성향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탐색해 보길 권한다. 정부 조직 바깥의 상황도 살펴야 함은 물론이다.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6라는 책이 있다. 정부 조직에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환멸을 느낀 사람이라면, 퇴직을 고려하거나 회사 밖에서 새로운 미래를 펼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저자는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홍보대행사 아르바이트와 대기업 인턴을 거쳐 5년 동안 로펌에서 일했다. 모든 샐러리맨들이 그러하듯 회사 일에 헌신했고 마침내 소진(燒盡)됐다. 다 타서 없어졌다는 말이다. 번아웃(burnout)됐다고도 말한다. 대기업 인턴 시절 조직의 일상을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 일부 소개한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팀에 배치받자마자 말로만 듣던 군대식 문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일주일 중 사흘은 만취하도록 회식을 했고, 고작 인턴 사원인 나와 동기들도 실적 압박에 시달렸다. 사무실에서 욕설과 폭언이 난무하고, 중요한 업무 지시를 회의실이 아니라 옥상 흡연실에서 하는 문화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마침 인턴 기간과 맞물렸던 추석 대목에 수백만 원 어치의 선물세트 영업을 떠안았을 때는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물론 강제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영업 실적은 내 점수에 반영되어 정규직 전환의 기준이 되고, 정규직이 된 다음에는 승진의 기준이 될 터였다. 애당초 그럴 능력이 없기도 했지만 나는 그 반강제 영업에 하나도 참여하지 않았고, 예상했던 대로 정규직 심사에서 탈락했다.


로펌에서 사무직으로 일한 저자는 ‘혹시 난 회사 체질이 아닌 게 아닐까?’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되고, 마침내 회사 밖에서 먹고살 것을 결정하게 된다. ‘회사 없이 먹고살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어떤 업계에서 프리랜서로 일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처음으로 자신의 취미와 특기를 진지하게 탐색한다. 어떤 일을 할 때 기쁜가. 어떤 일을 할 때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나. 저자는 막연하고 두려웠지만, 스스로의 인생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희망과 설렘을 느꼈다고 말한다.


진지한 탐색 이후 저자는 특기와 취미 목록을 작성했다. 책 읽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 외국어 공부, 요리, 핸드메이드 소품 만들기. 이를 토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또는 할 수 있는 프리랜서 직업 목록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핸드메이드 소품 판매자, 일러스트레이터, 요리사, 작가, 통역사, 번역가. 그리고 출판 번역가로 자신의 갈 길을 정한다.


그 다음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번역가가 되기 위해서는 번역 일을 따올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회사 밖에서 먹고살기 위한 저자의 나름 치밀한 계획, 고군분투,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굴러가 주지만은 않는 인생과 돌발 변수.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무척이나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퇴직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공채생이 있다면 이 책을 필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크게 공감하면서 읽게 될 것이고, 퇴직 이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 퇴직 이후에 가져야 할 마음 자세, 프리랜서로서 가져야 할 덕목에 이르기까지 많은 실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에 공헌하는 삶

우리가 전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공직자로서의 삶은 멸사봉공(滅私奉公)이다. 사욕은 버리고 공익에 힘쓰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야심가들로 말미암아 이 시대 공직자로서의 삶이 다소 혼탁해진 느낌이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공무원이 아침에 거리에 나와서 피켓을 드는 캠페인으로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지방정부의 캠페인으로 이웃 간 층간소음 분쟁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이 그 형식적인 캠페인을 하는 이유는 상급부서에서 하급기관으로 서식을 내려보내 추진실적을 요구하고, 평가 자료를 받아 순위를 매겨 포상금을 부여하기 때문이다.*7 그 포상금을 받기 위해 또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일 안 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일에 큰 의미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형식적으로 그 일을 하고 사진과 문서를 남긴다. 공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줄 알면서도 하는 일이 정부 조직에는 꽤 많이 있다. 나는 이런 일을 ‘가짜 일’이라고 표현한다(그런 일을 열심히 추진하는 담당자들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다).


이와는 달리, 자신이 주민등록상 어떤 상태인지, 어떤 행정 처리를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재외국민에게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쉽게 말해서 그에게 잘 설명해 주는 일―, 동 주민센터 직원들이 매일 관내를 순찰하는 일, 청소 민원을 해결해 주고, 꺼진 땅을 복구하는 일은 ‘진짜 일’이다. 안타깝게도 가짜 일이 진짜 일을 침범할 때가 많다. 아주 많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고. 공헌했다는 보람된 마음이 행복이라고. 아들러는 이때, 즉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공헌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타인에게 도움을 줄 때 아무도 그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을 갖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8


혹시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유력자가 그 일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짜 일을 하면서 가치 있음을 실감하지는 않았는가? 가짜 일을 하고 공동체에 유익한 일을 했다고 뿌듯해한다면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혹시 진짜 일을 멋지게 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칭찬은커녕 비판을 받은 일이 있는가? 마음이 많이 상하겠지만, 괜찮다.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조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고 한다. 미담이 유통되는 속도가 비록 가십에 비해 형편없이 느리기는 하지만, 조직원들과 세상 사람들이 언젠가 여러분을 알아줄 것이다.


아들러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길잡이 별’을 제시했고, 그 별은 ‘타자 공헌’에 있다고 했다. 21세기 초엽의 한국 정부 조직은 ‘길잡이 별’을 잃었다. 국가와 국민에 충성하자,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갖자, 사회에 기여하자, 공익에 이바지하자는 간부보다는 ‘내 말 잘 들어. 지금 구청장의 관심사는 이거야. 지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어.’라고 말하는 간부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면서 고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우국지사보다는 자신의 말에 충성된 반응을 보이는 야심가를 간부로 기용하고 싶어 하는 것이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마음이다.


정부 조직이 ‘길잡이 별’을 잃었다고 해서 우리까지 ‘길잡이 별’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진짜 일’은 시민과 공익에 기여하는 것이다. ‘가짜 일’에 동원될 때에는 한 템포 쉬어 가고,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에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윽박지르는 말에 위축되기보다는 법 규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자. 기계적으로 법 규정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혹시 그렇지 않다면 실무자에게 숨 쉴 만한 재량의 틈은 있는 것인지 검토해 보자. 강경하고 무례한, 그래서 특별한 민원인이 아니라면 시민 고객을 정성스럽게 맞이하자.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이 힘든 시대에 이들 역시 너무나 많이 지쳐 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면 자신의 성향과 필살기를 잘 생각해 보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자. 타인을 돕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일이 공무원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여건이 여러분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시점이다. 하지만 수십 대 일, 백 대 일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공직에 입문한 여러분들이다. 지금의 어려움은 여러분을 단련해서 더 좋은 사람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인생에 잠시 있는 고비다. 여러분이라면 이 고비도, 능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 기여율―내야 하는 돈―은 기준소득월액의 7%에서 점진적인 상향을 거쳐 2020년부터 9%로 올라간다. 연간 지급률―받게 되는 돈과 관련된 비율―은 1.9%에서 점진적인 하향을 거쳐 2036년부터 1.7%로 낮아진다. 지급 개시 연령은 60세에서 65세로 올라간다. 2016년 개정 공무원연금법 시행 안내. 공무원연금공단 블로그 참조. https://blog.naver.com/geps_hongbo/220575929410 검색일 2019. 11. 15. 연간 지급률이란 연금에 1년 가입했을 때, 재직 시 소득의 얼마만큼을 받는지에 대한 비율을 말한다. 30년 일하면서 월 평균 300만 원의 소득을 가졌던 공무원이 퇴직했다면, 개혁 이전에는 매월 171만 원(300만 원×30년×1.9%)의 연금을 받았다. 개혁 이후 2036년부터는 이보다 18만 원이 줄어든 약 153만 원(300만 원×30년×1.7%)을 받게 된다.

*2 백운광. 2016. 「공무원연금 개혁, 평가와 과제」.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9. p.30.

*3 장강명. 2018. ‘당선, 합격, 계급: 문학상과 공채는 어떻게 좌절의 시스템이 되었나’. 민음사.

*4 김응준. 2019. ‘그놈의 소속감’. 김영사.

*5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2015. ‘미움받을 용기’. 전경아 譯. 인플루엔셜. p.221.

*6 서메리. 2019.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미래의창.

*7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서울시 **구지부 가입 권유문 참고. 2019. 7. 14.

*8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2015. ‘미움받을 용기’. 전경아 譯. 인플루엔셜. p.287-288.

이전 19화 공직자로서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