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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Sep 11. 2022

가족관계등록 제도와 그 역사

주민등록,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가족관계등록 제도 이전에 ‘호주(戶主)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때는 가족에 관한 사항이 호주를 중심으로 호적부(戶籍簿)에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호주에게 종속시켜 평등한 가족관계를 해친다는 비판, 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여성 차별적 제도라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습니다.*1 단적인 예를 들자면, 여성은 결혼 전에는 아버지가 호주인 호적에, 결혼 후에는 남편이 호주인 호적에,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호주인 호적에 올랐습니다.


찬반 논의와 치열한 주장이 오간 끝에 2005년, 헌법재판소는 호주제를 규정한 민법 조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위헌이지만 당장 효력이 없어지면 심각한 법적 공백이 있기 때문에 국회가 법을 보완할 때까지 효력을 유지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호적법과 호주제는 2007년 12월 31일까지 유지되다가 2008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폐지됐습니다.*2 그리고 같은 날, 호적법을 대체하는 가족관계등록법이 시행됐습니다.*3 기존의 호주 중심, 가(家) 단위의 편제 방식에서 개인별로 가족관계등록부를 편제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2008년 1월 1일, 바로 그날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제적(除籍)됐습니다! 호적부에서 다 삭제됐다, 이겁니다. 호적부에서 모든 국민이 그렇게 다 삭제됐다는 기록이 제적부에 남게 됐죠. 마지막 제적부를 떼면 법률 제8435호에 의하여 호적이 말소됐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법률 제8435호는 2007년 5월 17일 제정되어 2008년 1월 1일 시행된 호적법으로서 내용은 단 한 줄입니다.

호적법은 폐지한다.


호주제와 호적부에서 기억해 둘 것이 있습니다. 호주제에서는 한 사람에게 한 개의 호적부(옛날 그 당시에는 호적부, 지금은 제적부)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에게 여러 개의 호적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가 호주인 호적에, 결혼 후에는 남편이 호주인 호적에,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호주인 호적에 올랐던 여성의 예를 앞에서 말씀드렸죠.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980년대에 호적부 횡서화, 즉 세로로 써 있는 글자를 가로로 쓰는 사업을 벌인 적이 있고, 1990년대에는 호적부 한글화, 즉 한자를 한글로 쓰는 사업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4 시대 변화에 따라가기 위해서였겠죠.


그리고 2000년대 초반, 한국에 있는 모든 호적부를 일제히 전산화하는 작업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이때까지의 호적부는 담당자가 손으로 쓴 글씨, 타자기로 타이핑한 글씨가 혼재돼서 알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호적 등․초본을 떼려면 본적지 관할 행정기관에 알아봐야 하고 담당자가 종이 호적부를 찾는 동안 기다려야 하는 등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당국은 이런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마침 전자 정부를 국정 목표로 삼았던 정부가 호적부를 일제히 전산화하는 대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호주제가 폐지될 줄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어요.*5


지금은 이미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옛날 공채생 선배들이 이 모든 종이 호적부를 전산 시스템에 옮겼습니다. 호적 담당자가 중심이 돼서 이 대량 작업을 해 나갔습니다. 호적부를 스캔해서 이미지 자료로 등록하기도 하고, 텍스트 자료로 호적부를 구축하기 위해 호적부에 쓰여 있는 정보를 타이핑해서 시스템에 입력하기도 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한국의 모든 호적부를 대상으로 작업한 것이에요.


이 책을 쓰면서 제 옛날 호적부를 찾아 봤습니다.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이론상 한 사람에게 여러 개의 호적부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게 옛날 호적부가 다섯 개나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할아버지 호주의 손자로 등재된 호적부(스캔 이미지)

∙큰아버지 호주의 조카로 등재된 호적부(스캔 이미지)

∙아버지 호주의 아들로 등재된 호적부(스캔 이미지)

∙아버지 호주의 아들로 등재된 호적부(전산 텍스트)

∙본인이 호주로 돼 있는 호적부(전산 텍스트)


다섯 개의 옛날 호적부에서 큰 오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문서를 여러 번 직접 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또한 호적부를 전산화하는 대규모 사업 과정에서, 그리고 전 국민이 제적된 호적부 기재 사항을 토대로 새로운 서류인 가족관계등록부를 전산으로 입력․작성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옛날 종이 호적부에 모호하게 쓰여 있는 글씨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마구 흘려 쓴 글씨, 알아보기 힘든 글씨, 약자로 쓴 한자, 서기가 아닌 단기로 쓰여 있는 연도……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을 겁니다. 또 종이 호적부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면 전산 호적부에도 그 오류가 그대로 이어졌겠죠. 金炯烈 씨의 경우, 관공서에 잘못이 있다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여러 과정 가운데 오류가 있었을 겁니다.


만약에 그에게도 다섯 개의 호적부가 있었다고 가정해 볼까요. 어디에서 오류가 발생했는지 정확하게 진단하려면, 金炯烈 씨의 최초 출생신고서와 다섯 개의 호적부를 다 확보해 둬야 합니다. 의사가 병을 진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검사를 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애초에 아버지가 출생신고서에 ‘김형열’로 이름을 기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고는 이상이 없었는데, 첫 번째 호적부 기재가 잘못돼서 가족관계등록부까지 오류가 이어져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호적부까지는 오류 없이 기재가 잘됐는데, 네 번째 호적부를 옮겨 적을 때 오류가 발생해서 다섯 번째 호적부를 거쳐 가족관계등록부까지 오류가 이어져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관계등록부에 등재된 정보와 주민등록표에 등재된 정보가 다른 이유와 양상은 무척 다양합니다. 제가 접한 것 몇 가지만 예시로 들어 볼까요. ‘라’와 ‘나’ 불일치, ‘렬’과 ‘열’ 불일치, ‘룡’과 ‘용’ 불일치, ‘례’와 ‘혜’ 불일치, ‘형’과 ‘현’ 불일치, ‘卿’과 ‘鄕’ 불일치, ‘玹’과 ‘鉉’ 불일치.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 않나요? 두음법칙 적용 여부, 또박또박 쓰지 않고 흘려 쓰면 잘못 볼 수 있는 한글, 비슷하게 생긴 한자를 그 당시 담당자가 종이 호적부 또는 전산망에 잘못 기재한 겁니다!


같은 사람의 가족관계등록부와 주민등록표 생년월일이 불일치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권위 있는 정부 기관인 행정안전부에서도 이 생년월일 불일치 건에 대해서는 ‘불일치 발생 원인이 다양하고 보관 기간 경과로 관련 공부가 대부분 소멸돼서 특정 대상자의 불일치 원인 규명이 불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


홍보 만화에서는 전산으로 변동 사항을 관리하니까 걱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호적부를 전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류가 발생하고 말았다.


왼쪽 맨 아래를 보라. 가족관계증명서에 가족 구성원이 빠진 경우에는 호적 관서에 신고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이제 행정 최일선 현장에서 金炯烈 씨에게 어떤 멘트를 드려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그의 입장에서는 일생일대 사건일 겁니다. 평생 자신이 ‘김형렬’인 줄 알고 살았는데 가족관계등록부에서는 자신이 ‘김형열’이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 이런 일을 접하고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일단은 그분이 화가 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일 종종 있어요. 너무 흥분하실 필요 없어요.”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더 화를 내겠죠. 제가 권하는 민원 응대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의 압축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입장에서 충분히 흥분하실 수 있는 사안입니다. 가족관계등록부는 옛날 호주제가 있던 시절부터 호적부를 여러 번 옮기는 작업이 있었고,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전국의 모든 호적부를 전산으로 옮긴 일도 있었어요. 지금은 퇴직한 옛날 담당자들이 몇십 년 전에 다 수작업으로 한 일이다 보니, 그 과정에서 주민등록표 정보와 다른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이 정도로 말하면 상대방이 화를 좀 가라앉힐 겁니다. 이 담당자는 뭔가 좀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느낌을 주니까요. 물론 담당자 말을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는 민원인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화만 낼 겁니다. 그런 분들을 설득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위 응대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민원인이라면 이렇게 물어보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에 대해서는 그 일을 처리한 가족관계등록 처리관서에 문의하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먼저 전화를 해 보시고 말씀을 들어 보시죠.”


민원인이 가족관계등록부를 정정하고 싶어 한다면, 그 일을 처리한 곳의 가족관계등록 부서로 안내해 드리는 게 제일 효율적입니다. 주민등록 담당자가 옛날 호적부를 출력해서 옛날 기록을 살펴보고 진단하면,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오류와 그 오류의 원인을 찾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은 가족관계등록 담당자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최종 안내 멘트는 똑같습니다.


가족관계등록부와 주민등록표에 기재된 정보가 다를 경우, 이름은 어느 문서를 따른다고 했나요? 가족관계등록부를 따른다고 말씀드렸죠. 따라서 민원인이 주민등록표 등본에 기재된 ‘김형렬’로 가족관계증명서 이름을 바꿔 달라고 요구한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국 그 일을 처리한 가족관계등록 처리관서에서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대한민국 법원 전자민원센터’ 홈페이지(help.scourt.go.kr)는 金炯烈 씨처럼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원하는 사람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신고인, 신고 사건 본인 또는 이해관계인이 가족관계등록 공무원의 잘못으로 가족관계등록 기록을 빠뜨리거나 착오가 있음을 안 때에는 해당 사건을 처리한 시(구)·읍·면에 말 또는 서면으로 직권 정정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7



여기까지만 안내해 드리는 게 좋습니다. 굳이 이후에 어떻게 될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가족관계등록 담당에게 다 듣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이후로 金炯烈 씨의 민원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다음 내용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金炯烈 씨 주장대로 옛날 담당자들이 이름을 호적부에 잘못 기재하거나 가족관계등록부 전산망에 잘못 입력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 일을 처리했던 시(구)·읍·면의 가족관계 부서에서 현재 담당자가 직권 정정하게 됩니다. 정말 그런지 규정을 한번 확인해 볼까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규칙 제60조(등록부의 정정)

② 시·읍·면의 장이 법 제18조제2항 단서에 따라 감독법원의 허가 없이 직권으로 정정 또는 기록할 수 있는 사항은 다음 각 호와 같다.

  1. 등록부의 기록이 오기되었거나 누락되었음이 법 시행 전의 호적(제적)이나 그 등본에 의하여 명백한 때

  2. 제54조 또는 제55조에 의한 기록이 누락되었음이 신고서류 등에 의하여 명백한 때

  3. 한쪽 배우자의 등록부에 혼인 또는 이혼의 기록이 있으나 다른 배우자의 등록부에는 혼인 또는 이혼의 기록이 누락된 때

  4. 부 또는 모의 본이 정정되거나 변경되었음이 등록사항별 증명서에 의하여 명백함에도 그 자녀의 본란이 정정되거나 변경되지 아니한 때

  5. 신고서류에 의하여 이루어진 등록부의 기록에 오기나 누락된 부분이 있음이 해당 신고서류에 비추어 명백한 때

  6. 그 밖의 정정 또는 기록할 사유가 있음이 명백하여 대법원예규로 정한 경우


하지만 만약 金炯烈 씨 주장과는 달리 부모님이 ‘김형열’로 신고했고 그에 따라 호적부와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이 이상 없이 ‘김형열’로 등록된 것으로 확인된다면, 민원인 입장에서는 일이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관할 법원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한번 가정해 볼까요. 주민등록표에 기재된 이름 ‘김형렬’을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이름 ‘김형열’로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민등록표의 이름은 가족관계등록부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이 경우는 일 처리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정정신고서를 받고 신고에 따라 金炯烈 씨의 이름을 ‘김형렬’에서 ‘김형열’로 바꿔 주면 됩니다. 근거 규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민등록법 제13조(정정신고)

① 제11조와 제12조에 따른 신고의무자는 그 신고사항에 변동이 있으면 변동이 있는 날부터 14일 이내에 그 정정신고를 하여야 한다.


주민등록법 시행령 제20조(정정신고 등)

① 법 제13조에 따른 정정신고는 거주자의 경우에는 별지 제9호서식에, 재외국민의 경우에는 별지 제9호의2서식에 따른다.

② 시장·군수 또는 구청장은 제1항에 따른 정정신고를 받으면 지체 없이 전 거주지의 시장·군수·구청장 또는 등록기준지의 시장(구가 설치되지 아니한 시의 시장을 말한다)․구청장(자치구가 아닌 구의 구청장을 포함한다) 또는 읍·면장(이하 “등록기준지의 시장·구청장 또는 읍·면장”이라 한다) 등 신고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기관에 이를 조회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정정하여야 한다.


金炯烈 씨 민원을 받아 보니 어떠신가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어려운 민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는 가족관계등록 제도와 주민등록 제도가 있다는 것, 이 둘은 서로 다른 제도이고 서로 다른 기관에서 담당한다는 것, 하지만 이름, 한자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 핵심 개인 정보가 겹치다 보니 국민들은 물론 담당자도 두 제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 자료를 전산화하기 위한 대규모 작업이 각기 다른 시점에 이뤄졌다는 것, 마지막으로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정보와 주민등록표에 기재된 정보가 다를 경우에는 이름, 한자 이름, 생년월일, 성별 정보는 가족관계등록부를 따른다는 것. 이 정도 지식이 있으면 민원인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충분하게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9급 공채생들은 이런 내용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담당자들도 잘 모르는데, 국민들이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잘 알 리 만무하죠. 金炯烈 씨가 무작정 동 주민센터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항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동 주민센터는 한국에서 가장 심리적 문턱이 낮은 행정기관이니까요.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신참에게 체계적인 교육이 제공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 혼자 갖고 있는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민원대 일이나 신참 교육에 관심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선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민원대 일에 관심을 갖는 국장, 과장, 팀장 역시 적어집니다.


둘째, 민원대 일이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민등록 시스템에서 마우스 클릭해야 하는 일도 만만치 않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근거가 되는 규정을 익히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복지부동’이라는 인식과는 달리, 사회 변화와 함께 공무원이 익혀야 하는 제도와 규정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제도의 역사까지 풍성하게 알고 있어야 민원인에게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신참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언어로 공무원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조직 안에서 고수로 이름을 떨쳤던 천지안 주임 같은 고참을 내부 강사로 육성하면 신참들에게도 시민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 같은데, 간부들이 관심이 없으니 추진될 리 없습니다.


셋째,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담당자가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상사, 동료, 시민들이 이를 반가워하지 않죠. 그리고 대다수 실무자들은 ‘이론은 다 쓸데없고 현장에서 굴러야 진짜 고수가 된다’는 이데올로기에 상당 부분 기울어져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어서 말하는 게 낭비처럼 느껴집니다만, 이론과 실무 모두 균형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매일 아홉 시간씩 구르면서 특수하고 다양한 케이스의 민원을 끝없이 받고 있는데, 실무에서 뭐가 더 필요할까요.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처절하게 굴러서 업무 능력을 습득하라’고 하는 건 신참 공채생에게 무척 가혹한 일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담당자 간 업무 인수인계 과정이 무척 부실해졌죠.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면 시민들에게 체계적인 답변을 하기 어려워집니다. 충분히 납득할 정도로 설명을 듣지 못한 시민들은 정부와 공무원에 대한 불신을 쌓아 갑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펼쳐집니다. 이런 다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 공채생들의 일이 어려운 것이지요. 가족관계등록 제도와 그 역사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가족의 실종

실무와 크게 관계는 없지만, 흥미로운 기록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참여 정부 국무총리였던 고건 전 총리의 회고록 <국정은 소통이더라>라는 책에 가족관계등록 제도 탄생 비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8


호주제 폐지를 앞두고 있던 시기, 국무회의에 이와 관계된 민법 개정안이 올라왔습니다. 고건 총리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강금실 장관에게 물어봤습니다. 호주제를 폐지하면 호주를 중심으로 규정되었던 ‘가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법무부 장관은 ‘민법상 호주 규정이 삭제되면서 가족도 자동적으로 삭제된다’고 답했습니다. 당시 여성부 장관이었던 지은희 장관도 ‘그것은 호주제 폐지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회고록이 사실과 다르지 않다면, 그리고 만약에 논의가 여기서 끝났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옛날 호적부, 즉 제적부만 존재하고, 가족관계등록 제도와 가족관계등록부는 없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건 총리는 가족 해체가 사회 문제인 시점에 정부가 민법에서조차 ‘가족’을 삭제하는 건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안건을 보류했습니다. 이후 여성부와 법무부 정책 전문가를 총리실로 불러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 회의에서 어느 전문가는 “호주제 폐지로 가족 삭제가 불가피한 게 아니라, 여성 정책상으로도 가족이라는 건 법으로 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고건 총리는 이 주장이 일반 국민의 정서와 크게 동떨어진 논리라고 생각했다는군요.


결국 총리는 법무부 장관에게 호주 대신에 부부를 중심으로 ‘가족’을 규정하는 개정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로써 민법에 ‘가족’ 규정이 부활했고, 호주제를 대체하는 가족관계등록 제도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담당자들은 지금처럼 옛날 호적부, 즉 제적부는 물론, 호적부를 대체한 가족관계등록부도 다루게 됐습니다.


고건 전 총리는 그날 국무회의에서 ‘민법상’ 가족이 사라지는 일을 자신이 그냥 넘겼다면, 가족 해체 현상이 심각해지는 시대에 ‘정부가 앞장서서 제도상 가족을 폐지한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메시지를 사회에 던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도 ‘민법상 가족의 개념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해야, 실제 가족도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정책을 집행하는 우리가 하는 일이 이런 것입니다. 국회, 대통령, 행정기관, 사법부 등 정책 과정의 공식적 참여자들이 내린 의사결정에 따라, 지금은 퇴직한 여러 담당자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호적부를 스캔해서 전산망에 이미지 자료로 등록했고, 호적부에 쓰여 있는 정보를 타이핑해서 시스템에 입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민원대에 앉은 담당자들은 자신이 한 게 아닌 그 당시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며, 자신이 입직하기 전에 있었던 제도의 역사를 잘 파악해서 이런 사연을 잘 모르는 민원인에게 매끄럽게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체계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죠.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민원대 담당자들이 민원인에게도 내부 조직원에게도 이토록 가벼운 취급을 받는 것인지 무척 안타깝습니다.




*1 가족법 개정운동본부는 1958년부터 호주제 폐지와 양성 평등 가족법 체계를 목적으로 가족법 개정 운동을 벌였다. 송효진․박복순. 2013.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시행 5년: 평가 및 개선방안>. 한국여성정책연구원. p.11.

*2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를 규정한 민법 조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05년 3월 31일, 민법이 일부 개정·시행됨으로써 호주제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법률상 공백을 막기 위해 호주제 관련 규정 삭제의 시행일을 2008년 1월 1일로 유예했다. 송효진·박복순. 2013.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시행 5년: 평가 및 개선방안>. 한국여성정책연구원. pp.13-14.

*3 그 전해인 2007. 5. 17.에 제정되고, 2008. 1. 1.부터 시행됨.

*4 행정안전부. 2021. <2021 주민등록 질의·회신 사례집>. p.81.

*5 나무위키. namu.wiki ‘제적 등·초본’ 검색일 2022. 1. 2.

*6 행정안전부. 2021. <2021 주민등록 질의·회신 사례집>. p.81.

*7 대한민국 법원 전자민원센터 홈페이지>절차 안내>가족관계등록>가족관계등록 비송. https://www.scourt.go.kr/nm/min_17/min_17_6/index.html 검색일 2022. 2. 27.

*8 고건. 2013. <국정은 소통이더라: 고건의 공인 50년 다큐 스토리>. pp.13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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