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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미술사학도 Mar 05. 2024

불화(佛畵)로 시대 읽기 - 2

조선 불화의 민중 지향성

https://brunch.co.kr/@a232355/71


(고려 불화를 다룬 이 글을 먼저 읽으시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겁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하였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대 주희(朱熹, 1130~1200)는 불교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는데, 그는 당시 송(宋)이 요(遼)나 금(金) 같은 북방계 유목국가에 비해 열세였던 이유를 외래 종교인 불교에서 찾았다. 중국 전통의 유학을 멀리하고 불교와 같은 이단(異端)을 가까이 한 영향으로 국가가 쇠퇴했다는 그의 인식은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일례로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은『불씨잡변』이라는 저술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였다. 불교에 우호적이던 태조 대에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으나, 태종과 세종 대에 이르러 강도 높은 억불책이 시행되었다.


억불책은 다방면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다양한 종단이 통폐합되었다. 그 결과 세종 대에는 교종(경전을 중시하는 종단)과 선종(참선을 중시하는 종단)만이 남았다. 사원의 경제권을 박탈하는 조치도 시행되어 방대했던 사원 소유의 토지와 노비가 국고로 환수되었다. 또한 승려들은 무위도식하는 집단으로 여겨졌기에 도첩제를 시행하여 아예 출가를 원천봉쇄 하고자 하였다. 백성들이 승려가 되면 그만큼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부족해져 농업 생산량이 줄어든다. 이는 세금이 그만큼 덜 걷힌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국가로서도 백성들의 출가를 막으려 하였다.


사진1.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주자 영정>과 13세기 동아시아 지도. 당시 송(宋)은 금(金)의 공격으로 수도 개봉이 함락된다. 이후 강남으로 후퇴하여 왕조를 이어가니 남송이된다.



그럼에도 불교는 명맥을 이어갔다. 새 나라가 들어섰지만 500년간 이어져온 고려의 풍속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왕실에서는 비빈(妃嬪, 왕비와 궁녀)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불교가 신앙되었고 국왕과 종친들도 불교를 많이 믿었다. 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태종의 2남 효령대군, 말년의 세종, 세조와 정희왕후,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모후였던 문정왕후는 대표적인 왕실의 호불인사였다. 또한 억불책을 적극 시행했던 국왕들도 왕실 여성들의 신행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궁중의 불사를 비판하는 유생들의 상소를 묵살하거나 여인들의 일이라며 눈 감아주곤 했던 것이다. 왕실의 상례(喪禮)도 불교식으로 이루어졌다. 실례로『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20일 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공녕군(恭寧君) 이인(李䄄)대자암(大慈庵)에 보내어 법화법광(法華法廣)을 설행(設行)하였다. 선(禪)을 설법하도록 청하는 글에,


"가만히 생각하니, 《법화(法華)》는 천가지 경(經)을 관할하고 여러 부처의 근본이며, 영험은 헤아리기 어렵고 이익이 가장 큰 것이로다......(중략) 공손하게 생각하건대, 태종(太宗)께서 빈천(賓天)하심이 매우 급하시어 성상께서 효사(孝思)하심이 한없으시도다. 햇수는 벌써 3년이 돌아왔으나, 부르짖고 사모하심은 곧 하루 같으시도다. 명복을 도와 선유(仙遊)로 인도하고자 하노라".......(중략)


당초에 태종이 승하하신 뒤에 임금이 유계문(柳季聞)·안지(安止)·최흥효(崔興孝) 등에게 명하여 금자(金字)로 《법화경(法華經)》을 써서 완성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피람(披覽)하였던 것이다.


                                  -세종실록 24권, 세종 6년 4월 20일 을축 3번째 기사-




태종이 승하한 뒤에 대승경전인 『법화경』을 설법하는 법회를 열어 그를 추모하였으며, 국왕인 세종이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신하들에게 법화경을 금니로 사경하도록 지시하였다는 내용이다. 조선 초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과연 조선이 숭유억불의 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국가 차원에서도 건국 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는 국행수륙재를 주기적으로 베풀었다(사진2). 불교에 비판적이었던 사대부들도 정작 집안에서는 불교식으로 제례를 지내거나 조상의 위패를 사찰에 모셔놓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불교의 영향력은 조선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현실 정치 이념과 윤리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성리학은 사후 문제와 연관된 측면이 약했기에 불교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15세기까지는 성리학과 불교가 공존하는 이러한 경향이 지속되었다.



사진2. 태조 이성계는 건국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삼각산 진관사에 수륙도량을 설치하고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사진 : 진관사 수륙재)



16세기로 접어들자, 조선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보다 심도있게 이해하게된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을 현실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재래의 많은 풍습과 여러 통과의례들이 성리학적 규범에 맞도록 정비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잔존하던 불교식 의례들이 혁파의 대상으로 고려된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중종 대에 국행수륙재가 혁파되고만다. 이제 수륙재는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가 아닌 왕실 내부의 상례로서만 행해지게 되었다. 유생들은 그마저도 마뜩지 않게 여겼다. 1674년 현종 대의 기록을 살펴보자.




장단(長湍) 유생 정탁(鄭鐸)이 내간(內間)에서 대행 왕대비(죽은 현종의 모후)를 위하여 불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수륙재(水陸齋)라는 것을 송도(松都)화장사(華藏寺)에서 설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장의 소를 올려 잘못인 것을 극구 말하였다. 이에 삼사·정원이 번갈아 글월을 올려 그만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다가 연이어 사흘을 아뢰자 비로소 그 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정원이 파발말을 놓아 달려가서 정파의 명령을 전달하게 할 것을 청했는데, 막상 갔을 때는 수륙재가 이미 행해진 뒤였었다.


                                 -현종개수실록 28권, 현종 15년 6월 3일 병신 2번째 기사-




이후 수륙재가 공식적인 기록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유교식 의례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국가와 지배층으로부터 불교가 점차 외면받자, 불교계도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특히 지배층을 대신할 신도들의 확보가 절실하였다. 그래야만 교단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목한 대상은 민중이었다. 따라서 불교계는 문맹이었던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어려운 수행이나 교학적인 측면보다는 신앙과 의례적인 측면을 강화하게 된다. 특히 망자(亡者)를 천도하기 위한 목적의 의례가 선호되었는데, 이를 위해 사십구재나 영산재, 수륙재 등이 사찰에서 활발하게 개최되었다.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형이상학적인 성리학보다는 불공만 열심히 드리면 극락왕생할 수 있는 불교가 더 마음에 와닿았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성리학은 종교적인 측면이 취약하였는데, 이러한 측면은 억불책이 극심했던 조선에서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이는 그만큼 불교의 사회적 기반이 공고하였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임진왜란기의 의승군 활동은 지배층들이 불교를 다시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위정자였던 자신들은 적이 나타나자 줄행랑을 쳤는데 정작 핍박받던 승려들이 목숨걸고 싸웠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명 유정(四溟惟政)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 가서 끌려간 포로들을 구출해오는 성과도 올렸다. 이후 불교를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의승군 제도가 상설 제도화되어 승려들이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에 상비군으로 주둔하였으며, 남해안의 사찰들은 의승수군 사찰로서 수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전란에서 활약한 휴정, 유정, 영규 같은 승장들을 추모하는 표충사가 해남과 밀양 등지에 세워졌다. 이는 유교의 성현들을 제향하던 서원(書院)이나 사우(祠宇)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억불의 기조가 바뀌지는 아니하였으나 누그러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이제 불교도 엄연한 조선 사회의 한 축으로 인정받게 된 셈이다.


일부 사대부들은 학식이 높았던 고승들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이는 승려들이 사대부에 필적할만한 당대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승려들의 출신 성분도 다양해서, 양반 자제도 더러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적 소양을 어느정도 갖춘 상태에서 출가하였으므로, 사대부들로부터 무시받지 않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가마꾼 승려 이야기는 출신 성분이 낮은 승려들에 국한될 뿐이다. 승려는 후천적으로 선택하는 직업이었으므로 '조선 승려=천인'의 등식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야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는데, 숭유억불의 기조가 만연했던 시대적 상황과 민중을 신도층으로 포섭하고자 했던 불교계의 태도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깊이 있게 조선 불화를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원형 구도의 조선 불화


조선 불화에서도 본존은 여전히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돋보이게 묘사된다. 그러나 고려 불화의 본존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묘사된 반면, 조선 불화에서는 보다 가까워진 느낌이다. 아래의 지장보살도를 한번 살펴보자(사진3).


사진3. <지장보살도>, 조선 15세기경, 삼베에 채색, 128.7 x 76.3cm, 일본 요다지(與田寺)


화면 중앙의 지장보살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주존으로서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 주위로는 6위의 보살(육광보살)과 도명존자(좌), 무독귀왕(우)이 합장한 채 원형구도로 서있다. 지장보살의 화면상 위치, 유일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고려하면 주존으로서의 위엄은 갖췄으나 고려의 지장보살도처럼 군림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얼핏 보면 명부세계의 회의를 주도하는 팀장 같다고나 할까? 이전보다 수평적인 인상이 강해졌다. 고려의 지장보살도와 함께 놓고 보면 그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질 것이다(사진4)


사진4. 좌측은 고려의 지장보살도, 우측은 조선의 지장보살



대승불교에는 많은 부처가 존재하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려 불화 중에는 아미타불화가 다수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미지수이다. 고려에서 아미타 신앙이 성행한 증거로 볼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이들을 약탈한 고려말 왜구나 임란 당시 일본군들이 아미타불화를 선호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아래 사진에서 고려와 조선의 아미타불화를 비교해보자(사진5).


사진5. 좌측 : 일본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아미타삼존도>, 고려후기,  우측 :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삼존벽화>, 조선 1476년


좌우측 불화 모두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을 그렸다. 우측의 조선 불화는 아미타삼존 외에도 나한 6위와 타방불들이 작게 묘사되어 있으나 아미타불과 양협시보살이 주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좌측 불화는 두 협시보살의 머리가 본존의 무릎에 오는 정도이나 우측 불화에서는 본존의 어깨 높이까지 올라왔다. 앞에서 본 지장보살도와 마찬가지로 본존의 위엄은 지키고 있으나 원형에 가까운 구도를 택하여 보다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듯 보인다.


조선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신앙된 경전은『법화경』이며, 법화경의 주인공은 석가모니불이다. 전통 사찰의 주불전이 대부분 대웅전(大雄殿)인 이유는 여기에 근거한다. 법화경은 내용이 쉬울 뿐만 아니라 수지(受支)ㆍ독송(讀誦)만 하여도 그 공덕이 크다고 인식되었다. 이런 법화경을 기초로 제작된 불화가 영산회상도이다. 영산회상도 역시 여느 조선 불화와 마찬가지로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구도가 관찰된다(사진6).


사진6. 영국사 <영산회상도>, 조선 1709년, 충북 영동 영국사, 보물


위의 영국사 <영산회상도> 역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여러 보살과 제석ㆍ범천, 나한 및 사천왕 등이 둥글게 에워싼 모습이다. 비록 보살에 비해 나한과 제석 등이 다소 작게 표현되어 어느정도의 위계질서를 보이고는 있으나 고려 불화 전반에서 보이는 위계성 짙은 구도는 아니다.



다만 조선 불화 중에도 고려 불화와 유사한 구도를 보이는 사례가 일부 있는데, 주로 왕실에서 발원한 불화가 그렇다. 아래의 사진들은 문정왕후가 1565년 회암사에서 발원한 400점의 불화 가운데 일부이다(사진7).


사진7. 좌측) <약사삼존도>, 국립중앙박물관   가운데)<약사삼존도>, 일본 류조인(龍乘院)   우측)<석가삼존도>, 미국 버크컬렉션


문정왕후가 발원했다는 400점의 불화들은 같은 초본을 바탕으로 대량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불화임에도 고려시대와 유사한 구도가 선택된 배경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추측을 해본다면 왕실 내부에서 신앙되던 불화의 도상을 답습한 것이거나 화사들이 그들의 선호도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후자의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면, 아무래도 왕가의 사람들은 서민들과는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자신들의 고귀한 혈통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라 여겼을 것이고, 그렇기에 보수적인 고려 불화의 구도를 더욱 선호했으리라 본다.



조선 불화의 원형 구도는 보다 평등해진 시대상을 반영


서두에서 조선의 숭유억불책이 불교계의 민중지향적인 태도를 이끌어냈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조선 불화에서 부처와 권속 간의 위계가 느슨하게 나타나는 한가지 배경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정된다. 덧붙여 또 한가지 이유를 추론한다면, 그것은 조선 사회의 신분 질서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은 근세로 분류된다. 이 시기는 본인의 노력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 양인 신분으로 글 공부를 하여 과거에 합격하면 누구나 양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양반의 지위는 4대까지만 세습이 가능했다. 제 아무리 뼈대 있는 양반가라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신분 유지가 어려웠기에 본인의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물론 글 공부라는게 어느정도 여유있는 집안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양반은 사실상 세습되는 신분에 가까웠다. 그래도 신분 상승의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고려에 비한다면 명목상으로나마 가능했던 조선이 조금 더 나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가 되면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히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육체 노동을 하는 양반들도 나타났다. 조선 전기까지 공고했던 신분 질서가 흔들리며 차츰 재산의 유무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사찰도 마찬가지여서 양반과 어울리며 학문을 논하는 고승들이 있던 반면,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천한 승려들이 있었다. 그리고 공명첩을 구입하여 양반 신분을 획득한 승려들도 더러 있었다. 모든 미술은 시대의 산물인만큼, 조선 불화의 원형 구도는 조선 사회의 이러한 특성을 어느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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