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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Nov 26. 2021

체리 블로썸

토요일 아침, 남편과 아이들은 시댁에 다녀오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난 집에 있기로 했다. 과제는 모두 끝났지만 들어야 할 강의와 끝내야 할 작업이 남아있었다. 세 명이 차지했던 공간이 휑하게 느껴졌다. 그리 큰 집도 아닌데 말이다. 마음은 편했다. 규칙적으로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이래라 저래라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비자발적 브레이크로 할 일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 공간을 제외한 모든 것은 외면 상태를 즐기길 바라면서.


얼마전 화방에서 모래알처럼 생긴 보조제 '젤 스톤'을 샀다. 치과에 갔다가 우연히 어떤 작품을 봤는데 그것과 비슷한 질감을 표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전시회에 <우리 아빠>의 연작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어둡고 쓸쓸한 느낌의 나뭇가지를 표현한 데 약간의 변명이 필요하기도 했다. 분명 아빠는 내게 그런 존재만은 아닐텐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젊은 시절을 생각했고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어김없이 생명이 피어나던 그때를 표현하고 싶었다. 나에게 너무나 큰 존재였던 그때를 말이다.


머릿속에 구상은 돼 있었지만 빈 캔버스를 보는 순간 무엇부터 해야할지 막막했다. 8절 보다 1.5배 정도 큰 화면을 젤 스톤으로 채우고 딱딱하게 굳으면 그 위에 배경을 어둡게 아크릴 물감으로 도포할 예정이었다. 작은 점들의 병치 혼합을 이용해 깊이 있는 색감이 나타날 수 있도록 점묘법으로 배경을 채울 생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도구가 면봉이다. 면봉으로 짙은 색 부터 칠하고 점점 밝은 톤으로 올린다. 그러면서 밝은 것 아래 어두운 색은 그림의 깊이를 느껴지게 할지도 모른다.


순전히 계산된 방법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실험적으로 해보고자 했던 것도 있었다. 역시나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하루를 온종일 공들여 점을 찍고 붓으로 그리고 물감 위에 물감을 또 올리면서 직감적으로 이 판은 엎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의 형체가 들어나면서 부터였다.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질감의 표현이며 전혀 따뜻해 보이지 않는 어수선한 면의 질감들이 눈에 거슬렸고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얼룩진 얼굴을 검은색으로 모두 발라버렸다.


어느 작품도 똑같이 모사 할 수는 없어. 그건 내 것이 아니지. 작업 과정을 덮어버린 검정 아크릴 물감은 누군가의 작품을 실험적으로 접근하려했던 나의 정신까지도 덮어버렸다. 이제 이 검정 캔버스 위에 나의 그림을 그리면 된다. 아빠의 방법으로 어린 아이에게 손내밀었던 어렴풋한 그때를 생각하며 그동안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던 따뜻한 느낌의 작품들을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스톤 질감의 검은색 캔버스 그 위에 번지는 봄향기의 울렁거림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할 두 인물 아빠와 나.


영국 현대미술의 대표주자 데미안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에 상어를 넣어 전시하고 알록달록한 알약을 늘어놓고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표현하는 등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방법로 표현해 시대의 주목을 받았었다. 그런데 2021년 6월 그는 '체리 블로썸(Cherry Blossoms)' 벚꽃 그림으로 돌아왔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닮고 있다고 하는데 다소 엉성해 보이는 작품들을 보면서 난 눈물이 날뻔했다. 그의 작업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큰 캔버스 위의 후두둑 떨어질 것만 같은 만개한 벚꽃들이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그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실제 전시에 가서 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 기억과 느낌을 아주 작은 캔버스로 옮겨오고 싶었다.




언젠가는 아주 자유로운 방법으로 묘사에 구애받지 않고 데미안 허스트의 체리 블로썸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거칠거칠한 면에 면봉으로 아크릴 물감을 찍어서 올리고 또 올리는데 그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점점 캔버스가 작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꽃나무 아래는 작은 아이가 놀고 있다. 아이는 낮에도 밤에도 심지어 매일 찾아와 꽃나무 아래 서서 나무를 올려다 본다. 마치 나뭇가지가 손잡아 주는 것처럼 친구를 대하듯 말이다. 나무는 아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굽혀 자라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며 세상은 아름답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롭기도 하다며 알려주는 듯하다. 아이가 자라 나뭇가지에 팔이 닿을 무렵 만져지는 실체는 보는 것보다 차갑고 까칠하며 둔탁하다는 걸 알았을까 ... 나무가 보여주는 세상이 더이상 좋아보이지 않았을 거다. 아이는 이해를 바탕으로 교감하길 바라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아빠는 그때와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은하, 아빠와 나, 2021, Mixed media on paper, 53 X 41cm



아빠는 아직도 꽃이 피는 나무다. 그 나무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가 내 안에 아직 남아있다. 다만 같은 눈 높이로 바라봐 주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관계에 오류가 생기면 더이상 머물지 않아도 되니 떠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 같다. '아빤 원래 그래' 큰 오빠는 그렇게 말한다. 난 그 말이 싫다. 또렷한 기억은 없지만 적어도 어린시절 아빠의 모습은 체리 블로썸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빠랑 엄마랑 행복해지고 싶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싶다. 함께하는 순간을 경이롭다 여기고 싶다. 그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언제 이 그림을 아빠에게 보여줄지 모르겠다.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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