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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생존의 몸짓 혹은 재앙의 씨앗

언더 더트리(2017)

by 무비 에세이스트 J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개개인들은 본인 이외의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 혹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별많큼 많은 사람들과 그 보다 더 많은 그 들 각각이 지닌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나 이외의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그 내밀한 이야기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다가가서 알아보려 했다면 얼마든지 알만한 그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공유되지 못한 채 내 안에 갇혀 섬이 되어 버리면, 나 또한 섬이 되어 세상과 단절되게 됩니다. 여기서 불행은, 우리 각각이 섬이 되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기보다, 내면에 섬을 지닌 채 다른 사람들과 한데 섞여 끊임없이 소외감을 느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섬이 된 개인들이 맞부딪히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오늘의 영화 언더 더 트리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소개>

영화 언더 더트리는 2017년에 아이슬란드에서 개봉하고, 2018년에 한국에서 개봉한 아이슬란드 영화입니다. 그러나 제작은 아이슬란드 이외에도 독일, 프랑스, 폴란드, 덴마크에서 합작하여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아이슬란드어를 사용한 영화이다 보니 한국 관객들에게는 철자나 발음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영화는 옆집에 살며 이웃하고 있는 발드빈 부부와 콘라드 부부, 그리고 발드빈 부부의 아들인 아틀리와 그의 아내 아그네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틀리와 아그네스는 클럽에서 만나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아이가 생겨 결혼한 사이로 최근에 부부 사이가 안 좋은 상태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아틀리가 전 여자 친구와 찍은 포르노 비디오를 보며 자위를 하다 들키는 바람에 아내에게 쫓겨나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됩니다. 발드빈 부부는 실종된 큰아들로 인해 상심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특히 아내인 잉가가 정신상태가 다소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들의 옆집에 사는 콘라드는 모델 출신의 젊은 아내와 재혼하여 살고 있으며, 재혼한 아내가 40살이 되면서 어떻게든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캡처.JPG 두 집에 걸쳐 있는 나무 한그루가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발드빈의 마당에 심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의 그늘이 콘라드의 현관까지 그늘을 드리우며, 양쪽 집안은 언쟁을 하게 되고, 이 일이 있은 후,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상대를 의심하다가 결국은 아틀리는 나무에 깔려서 병원에 실려가고, 발드빈과 콘라드는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생각하나> - 인간은 사회적 동물

2000년 전 그리스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우리가 비록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듯 하지만, 우리의 존재의 기본은 결국 끊임없는 타인과의 관계, 즉 소셜 네트워크에 기반하며, 우리는 그 네트워크 , 즉 사회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영화 속의 두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한 채 반목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서로에게 네트워크를 형성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이기적이 될 때 그 네트워크의 공고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어있죠. 인간이 너무나 인간스러워서 갖는 비극은 자신의 존재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하는 교만함에 있습니다. 나만 중요하고, 내 자식만 귀하며, 내 생각은 항상 옳다는 그런 태도 말이죠.


<생각 둘> - 타인의 존재가 전제된 나의 존재

2008년에 나왔던 다큐멘터리 영화 ‘맨 온 와이어'에는 지금은 사라진 맨해튼의 쌍둥이 건물 사이에 밧줄 하나를 걸어놓고 건너는 남자 필리페 프티의 아슬아슬한 스턴트가 나옵니다.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사이를 걷는 필리페 프티

너무 무모하고 아찔해 보이는 그의 도전은 작은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고층 건물 위에 걸려있는 줄 하나. 어쩌면 우리의 인간관계는 두발을 안심하고 내딛을 수 있는 평지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천만한 외줄 위에 놓여 있는 것과 더욱 흡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만 이 경우, 줄의 양끝에 나와 나의 상대, 이렇게 두 사람이 균형을 잡고 서있는 그림을 연상해보시면 쉽게 공감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줄의 끝에서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상대가 없다면 내가 어떻게 쉽사리 균형을 잡고 서 있을 수 있을까요. 그가 만일 발을 헛디뎌 줄이 크게 요동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요. 그도 나도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겠죠. 나에게 있어 균형을 맞춰주는 그의 존재가 나를 존재하게 하듯, 상대에게도 나의 존재는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런 상호보완적 관계가 바로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속성입니다.


<생각 셋> - 소통은 공존의 플랫폼

영화 언더 더트리는 관객을 짜증과 공포로 몰고 가는 기제로써 소통의 불완전성을 사용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행위가 비연속적으로 비치도록 그려내는 것은 다분히 개연성이 떨어지는 인과관계에 의해 인물들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이런 부자연스러움과 과장됨은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답답함을 불러일으키며, 결말에 대한 예견 가능한 암울함은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죠.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아틀리-아그네스 부부를 보죠. 둘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 우리는 둘 사이에 어떠한 공감의 대사도 오가지 못함을 쉽사리 알아챌 수 있습니다. 둘은 같은 장면에 존재할 뿐, 서로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다음은 나무 그늘 때문에 시비가 붙는 두 부부. 각 부부는 그들만의 아픔이 있어, 그들의 살갛에 닿은 작은 가시조차 커다란 창에 베인 것처럼 반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 부부만의 속사정일 뿐입니다. 만일, 아틀리와 아그네스가 혹은 아틀리의 부모와 옆집 부부가 평소에 서로에게 다가가, 서로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어땠을까요. 아사는 엄마와 아빠와 한집에 살며 완전한 부모의 사랑을 받았을 수도 있고, 아틀리의 아빠 발드빈은 옆집 남자 콘라드와 피투성이가 되어 서로를 죽이는 일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캡처 6.JPG 자신의 불통과 확증편향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홀로 남은 잉가

소통의 부재 혹은 불완전한 소통은 공존의 가능성을 아예 없애거나 불완전하게 공존하게 합니다. 이런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면, 우리 역시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과 별반 차이 없이 그저 자신이 소유한 것에만 의미를 둘 뿐, 타인의 소유가 있어야만 나의 소유가 명확해진다는 개념에는 전혀 관심도 없거나 아예 무지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우리가 맞게 되는 것은 영화가 보여주듯 ‘공멸' 일 것입니다.




<생각 훈련> - 그 하찮은 나무 아래 우리

고대로 마인들은 30만이 넘는 신들을 섬겼다고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에는 부부싸움의 수호신인 ‘비리프라카'여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온 부부들은 이 여신이 모셔진 신전에서 서로 30분씩 번갈아가며 각자 하소연을 했는데, 특이한 점은 둘이 한꺼번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상대의 하소연을 들어야만 했고, 이렇게 몇 차례 반복을 하다 보면 어느새 부부는 마음을 풀고 사이좋게 신전을 내려갔다는 겁니다.

우리의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나의 감정과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고 상대 역시 나에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상호적 행위의 반복적 교류에 의해 형성이 되며, 그 반복의 횟수가 많을수록 견고한 네트워크로 자리 잡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발드빈 부부와 콘라드 부부 사이에 놓인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차라리 두 집의 정중앙에 심어져 있었더라면 좋았을 그 나무로 야기된 사소한 불똥은, 처음엔 최소한의 소통으로도 쉽사리 진화 가능했던 수준이었지만, 철저한 소통 단절과, 확증편향의 지원을 받아 거대한 폭탄이 되어 인간을 덮칩니다. 인간의 감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하찮은 나무 아래에 살고 있던 인간들은, 어쩌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나무보다 더욱 하찮은 삶을 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캡처1.JPG 정말 이 나무가 원인이었을까?

내가 속한 사회는 개인인 ‘나’들의 집합이고, 그 나들을 하나의 집합으로 이어주는 것은 아주 작은 여러 번의 몸짓들입니다. 내가 유난히 힘들다고 느끼는 오늘 하루의 끝에는, 당신과 똑같은 힘듦을 짊어지고 어깨를 주무르는 내 주변의 누군가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통은 바로 그 사람에게 다가섬으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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