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라이즈, 비포선셋, 비포 미드나잇>
생각 훈련을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사실 방송의 주된 목적은 글쓰기의 소재를 만들기 위한 연습이자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매번 방송을 위해 모이면 어김없이 글쓰기에 대한 이러저러한 담론과 개탄이 있어왔지만 또한 이러저러한 우리의 사정으로 결국 글쓰기 작업은 시작되지 못했다. 소화는 뒷전이고 그저 욱여넣고 허기만 때우는 식사를 하는 기분으로 그동안의 방송을 만들어왔던 것 같다. 이러저러한 사정은 아마도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어디에 가있든 늘 따라다닐 것 같았고, 이제 올해를 놓치면 영원히 생각 훈련의 이름으로 나가는 책은 발행해 볼 수 없을 것 같아 부족한 대로 책을 내보기로 했다. 시즌 1부터 다룬 300여 편에 달하는 영화 중에서 나의 시작을 함께하고 가장 나다움을 보여주며, 생각 훈련 방송의 뿌리를 보여주는 작품 선정에 고심했으나, 늘 나의 머리와 마음속에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전설적인 영화 <비포(Before) 시리즈(Before Sunrise, Before Sunset, Before Midnight)>에 대한 의미 정리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의무감과 욕망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던 터라 이번 기회에 그 의무를 다하기로 결정했다.
영화사를 통틀어 최초이자 최후가 될 가장 긴 기간의 3부작인 이 독특한 영화 세편은 링클레이터 감독의 시간과 기억에 대한 관심과 철학이 가장 잘 녹아있는 작품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인터뷰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링클레이터 감독은 시간의 각 단층에 포착되고 새겨진 모든 삶의 양상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언급했는데, 이를 위해 94년 여름, 2003년 여름, 2012년의 여름을 3부작으로 만들어 보여주며 9년에 한 번씩 비춰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극 중의 캐릭터와 배우가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과 동기화되어 그 시기에 맞는 삶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방법은 영화 <보이후드(2016)>에서도 사용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감독은 영화적 서사와 보편적 삶의 서사를 일체화하여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이 영화의 일부가 되게 한다.
시간의 흐름을 관객에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감독은 단순한 발상에서 출발하여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대담한 시도를 한다. 즉, 한 커플이 함께 살아갔을 시간들 중에서 들여다보고 싶은 특정 시간대만 골라서 그 단면만 열어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자신의 영화 <보이후드>에서 주인공들의 12년에 걸친 삶을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만들되 주인공 소년의 삶의 특정 단계를 중심으로 보여주는 것 또한 같은 의도에서 나온 같은 방식이라 할 것이다. 감독은 결국 인간의 삶을 숱한 점으로 이루어진 선으로 보고, 하나로 연결된 선의 아름다움에도 의미를 두지만, 그 선을 만들어낸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작은 점들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점들은 선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시간의 모습은 3부작에 걸쳐 두사람의 외모의 변화, 대화 주제의 변화, 서로를 향한 몸짓과 감정의 변화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미리 결론부터 내려보자면 두 사람간의 사랑은 두 사람에게 주어진 공통의 상황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처럼,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족적을 전 인류에게 골고루 남기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영화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결국엔 그 시간의 족적과 흐름에 의해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무언가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선택한 도구가 "사랑"이라는 것이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모든 사람이 이 대목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사랑의 본질과 본성은 다시 한번 역설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사랑은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두 사람이 동시에 관여된 공동의 감정이자 상태이고, 따라서 두 사람 모두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
1994년의 풋풋했던 두 배우들의 영화 속 모습들은 2020년에 20대 초반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이상적인 낭만 혹은 희망에 그칠 수 있겠으나, 그 시절 배우들과 비슷한 나이였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화석이 되어버린 로망에 대한 깨달음, 혹은 그 시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1994년의 제시와 셀린의 감정이 충분히 사랑이라 칭할 만큼의 부러운 상황에 빠져들어서 일까? 사실 그들의 사랑은 아직 시작도 안된 상태이며, 단지 운명적인 부딪힘이 있었는데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알아보았다는 상호신호를 한 데서 그치는 단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94년 여름의 그들을 보며 아득한 그리움을 갖는 것은 사랑에 빠진 20대초반의 그들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운명적인 부딪힘을 겪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시작되는 것은 바야흐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고, 지구가 갑자기 나와 나의 상대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는 것이며, 상대의 존재만이 내 존재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겪어내면서도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응답을 잊지 않고 그 응답자를 찾아 자신의 응답의 가치를 알아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순간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사랑을 생각해 본다면 비포 3부작중 비포 선셋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작가 줄리안 반스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역사란 기억의 불완전성과 문서의 부적합성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확실성”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일생을 한 사람의 역사라고 일컬을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정의는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에 대한 기억을 수집하고 조합하여 하나의 순간 혹은 사건, 더 나아가 삶에 대한 명제를 얻고자 할 때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더해 역사의 평가가 서술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행위와 의도를 합리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듯, 한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 역시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경향성을 지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994년 여름의 제시와 셀린은 20대 초반의 대학생들로 이제 막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만나고 경험하는 단계였다. 그들은 이성과의 잦은 만남과 이별이 일상화되었을 나이이고, 그 짧은 주기에도 운명을 걸만큼의 의미를 부여하며 빠져들 나이였다. 아직 많은 삶의 시련을 겪지 못해서 생활인으로서의 각박함, 이를테면 이루려던 꿈이 하나하나 부서져 가며, 꿈에 가장 근접한 지점에서의 현실적 타협에 의한 자위에서 오는 비애 등을 알지 못한다. 이들이 아는 것은 이론이고 이들이 믿는 것은 이상이고 상상이었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타지에서 만나 짧은 순간 서로에게 느꼈던 깊은 호감과 끌림은 그 이후의 삶에서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부딪힘은 마치 여행지에서 접한 낯선 문물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 같은 것이어서 반드시 일상과는 커다란 괴리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 죽을때까지 살아낼 모든 시간 중에서 짧지만 가장 반짝이는 청춘의 시간에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일정 때문에 억지로 떨어지게 된 이 두 사람이 그 이후 9년간 자신의 일상에 속하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결국 하나의 커다란 맥락 - 특별하지 않은 평범함이라는 맥락 - 으로 정리될 수 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을 먹듯 겪어야 하는 일상의 관성적인 메커니즘으로 그들의 그 이후 9년은 압축 정리될 수 있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이 둘은 각자 결혼도 하고, 연애도 하지만 좋았을 초기의 단계를 지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게 될 그 다음 단계들로 접어들면 어김없이 적응/조정기에 접어들게 된다. 어떻게든 극복해 보고자 힘쓰던 조정 단계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문제극복에 대한 동기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그만큼의 유인책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파국의 순간 직전에 아마도 파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기억은 바로 9년 전의 그 꿈같았던 비현실적인 ‘모든 게 좋았다’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조작하거나 편향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시간이 흐르고 반복의 횟수가 많아지면서 내재화되고 어느 순간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되어버리기 쉽다. 우리가 흔히 Good Old Days 혹은 Golden Age를 떠올리며 과거의 자신을 회상할 때는 주로 현재의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이 불리하거나 위로가 필요한 경우이다. 비겁한 현실회피가 될 수도 있고, 무의미한 미화가 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쉽게 그리고 자주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고 간직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현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기억의 속성상 부정확함은 커지고 그에 비례하여 자신의 상상의 영역은 커진다. 상상속 자신은 우주에서 제일 다정한 연인이었고, 나의 상대는 그런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해주었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현재의 자신에게 꽤 만족하며 산다 해도, 우리의 현재는 항상 어린 시절의 우리가 가졌던 많은 가치를 상실한다. 순수함, 정의로움, 패기와 같은 가치는 나이가 들고 현실인으로서 살아가며 가장 먼저 포기할 수 있는 영역이 되어버린다. 같은 이유로 무모한 사랑, 그 무엇도 나의 상대보다 중요할 수 없는 사랑은 대체로 어린 시절의 산물로 여겨진다. 2003년의 제시와 셀린느에게는 바로 이런 추억, 혹은 이런 삶의 생생한 에너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생생한 추억은 생기 없이 살던 2003년 현재에 파리에서 조우했고, 이 영화는 조우 자체의 의미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만남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 <웨딩싱어(1998)>를 보면 주인공 로비 하트에게 노래 레슨을 받는 할머니가 나온다. 나중에 힙합을 부르는 모습에서 큰 웃음을 주는 역할인데, 그 할머니가 노래 레슨을 받는 이유는 결혼 50주년을 축하하는 노래를 남편에게 불러주기 위함이었다. 영화 <런던 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2015)>에서는 주인공 낸시가 부모의 40주년 결혼기념일에 축하연설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또한 영화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2014)>에서는 결혼 2년 차 때 이사 온 아파트에서 어느새 40년을 살면서 노부부가 겪는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40년이 넘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정말 대단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혼돈이 온다. 사랑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나에게 매우 중요한 누군가에 대해서 로맨틱하고 섹시한 감정을 갖는 것이라고 되어있고, 또 다른 정의를 살펴 봐도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감정을 느껴 그 사람에게 그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라고 되어있다. 즉, 사랑은 우리 인간이 지닌 느낌이나 감정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바래지는 책상도 아니고 사람처럼 세포가 있어 시간이 흐른 후 노화를 겪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그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감정이 늙을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서 늙거나 변하는 것은 그렇다면 그 감정을 담고있는 인간인 것이다. 결국 누군가와 오래도록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감정을 그 감정의 모습 그대로 온전히 유지한 채, 상대에게 고스란히 표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형이상학적으로 동의되는 사랑의 속성을 매우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실상 형이하학적인 우리는 몇 년의 사랑의 감정을 겪으면 상대에게 지치기도 하고 지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처럼 인생을 걸고 사랑을 맹세했던 그 사람이 내게 걸었던 마법의 힘이 빠져버렸을 때, 나는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나.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우리가 쉽사리 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시키며 자신은 면죄부를 받은 희생자인듯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다름 아닌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가장 친밀한 관계인데도 말이다. 이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비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비포 미드나잇이다.
생생한 추억을 지닌 채 터질 것 같은 그리움을 안고 재회한 제시와 셀린느. 그들의 삶에 또다시 9년의 시간이 흐른다. 이제 제시와 셀린느는 세상이 다 아는 유명한 연애의 주인공이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어떨까. 쌍둥이 여자 아이 둘을 키우며 모든 맞벌이 부모가 겪는 개인적 삶의 소실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커리어를 쌓다보니 막상 둘 사이의 시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 남들처럼. 아이들의 목소리가 집안을 거의 매일 채우고 있었고, 둘의 시그니쳐였던 시시콜콜한 대화역시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는 양육과 관련된 말의 주고 받음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더해 제시는 셀린느를 재회한 후 이혼을 하게 되어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사랑하는 아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픔을 겪고 있었다.
두 편의 전작들에서 전 세계에 로망을 심어주었던 둘만의 산책과 대화는 많은 사람들과의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 끼어든 하나의 에피소드로 바뀌어 버렸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내밀한 자신만의 이상과 세계관과 야심을 나눌수 있는 특별함을 공유했던 두 사람. 비포 선셋에서는 결혼과 연애, 잠자리, 직장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받아줄 수 있어 소중했던 두 사람. 그리고 이제 비포 미드나잇. 아이들 양육이야기, 제시의 집안 이야기, 그리고 급기야 상대를 속이고 바람을 핀 이야기를 하며 결국 서로를 잘 이해한 만큼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두 사람. 그래서 궁금하다. 우리가 사랑했던 로맨틱한 커플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 둘의 사랑은 9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생명을 다한 걸까. 셀린느는 제시와의 언쟁 끝에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방을 떠나버린다. 방에 혼자 남겨진 제시는 그녀가 남기고 간 찻잔을 바라보다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막상 뛰쳐나간 셀린느는 멀리 가지 않고 좀전까지 함께 일몰을 바라보던 식탁에 홀로 앉아 이제는 해가 다 저물어가는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이 정말로 가버린 걸까. 나는 이 대답을 일몰을 바라보던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 장면에서 찾았다. 몇 년 만에 어렵게 마련한 둘만의 로맨틱한 저녁은 결국 파경직전까지의 격한 싸움으로 끝이 났다. 자신들의 감정 밑바닥에 쌓여있던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모두 다 토해내고 무언가 홀가분해 보이기 까지 하던 그녀는 저녁하늘을 바라보며 반복적으로 속삭인다. “Still there. Still there”라고. 해가 거의 산너머로 넘어가는 장면이었는데 아직도 해가 보인다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해는 저물었다.아름답고 고운 저녁노을을 남긴 채.
해가 저물면 해가 과연 사라져 버리는 것인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해는 우리의 시야에서 가려지는 것일 뿐 그 자체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지구의 자전 덕분에 일정 시간 동안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되는 것 뿐이니. 우리의 사랑을 여기에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시간과 사랑의 관계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아침 해가 떠오르듯이 우리에게 생겨난다. 사실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사방이 이미 밝다고 해서 바로 해가 보이지는 않는다. 밝아지고 나서야 해가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이렇듯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설레고 행복한 감정이 들기 시작한 것이 사랑이 시작됨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랑의 전조 같은 것일 뿐. 눈부신 햇살에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사랑이 생겨난다. 정오에 머리 위로 떠오른 태양은 마냥 우리에게 행복한 기분만을 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 강렬함에 그 태양을 피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사랑 때문에 마냥 기쁘기만 할 수는 없는 일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간다. 가장 강렬한 오후의 태양을 지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온 우주에 형형색색의 예술작품을 선사하는 저녁의 마지막 태양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는 잠깐의 헤어짐 - 밤이 온 것이다 -이 발생한다. 나의 현재의 어려움에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나의 감정에 나로서 마주하며 추억에 기대어 현재의 상황을 비하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술작품 같은 일상에서의 사랑을 마주할 수 있으며, 밤이 선사하는 어둠 속에잠시 후면 빛나는 얼굴로 나타날 태양이 숨어있듯, 늘 우리와 함께하는 우리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셀린느가 제시와 이별을 고하고 나와 혼자 마주한 밤하늘에도 여전히 태양은 숨어있었으며, 제시가 그녀와 합석하며 그녀에게 일깨워준 사랑 혹은 삶의 본질 즉 , “우린 결코 돌아갈 수 없어. 완벽하진 않지만 이것이 진짜고 현실이야”라는 말과 함께 다시금 제시와 함께 삶을 살아가기로 한 셀린느의 깨달음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깨달음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결국 상대가 밉고 지겹고 매력이 없게 느껴진다면 그들은 더 이상 우리가 처음 만나 사랑했던 완벽하고 아름다운 태양의 모습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구름뒤에 숨어도 태양이고, 결국 노을로 산화되어 황금빛 가루처럼 작게 부스러져 흩날리더라도 그 역시 태양이다. 오히려 밤동안 사라질 태양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눈물겨운 자기희생적인 선물일 수도 있다. 나를 잊지 말라고. 밤이 있어야 아침이 오는 것이고, 밤의 어두움으로 인해 낮의 밝음에 당신은 감사할 수 있는 거라고. 40년 이상 함께 한 커플들은 이미 여러 번의 순환적 반복을 통해 이런 사랑의 주기를 터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점이 연결되어 선을 이루듯이 우리의 삶은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억이 사진처럼 명확한 순간들도 있고, 이미 우리의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버린 순간들도 있다. 내 삶의 영광의 순간들, 사랑하는 이를 처음 만났던 순간들, 내가 가장 자신만만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 그러나 어떤 순간에서도 우리의 삶은 존재했고 우리의 삶은 흘러갔다. 아주 풍부하고 의미 있게. 이런 한순간 혹은 한 시절에 담긴 칼 같은 소중한 기억과 일상의 단상을 링클레이터 감독만큼 꾸밈없이 그러나 민낯으로 그려내어 비춰주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링클레이터와 함께하는 우리 모두는 커다란 축복을 받은 셈이다.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보이후드(2014)>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소녀와 메이슨의 대화에 링클레이터의 시간과 그 순간의 중요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 다들 순간을 잡아라(Seize the moment)라고 하는데 나는 순간이 우리를 잡는 것(The moment seizes us) 같아. “
결국 우리는 매 순간을 우리 의지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의지와 상관없이 그 순간 안에 붙잡혀 머무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순간에 우리가 머물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순간은 내 삶에 의미있는 수많은 순간 중 하나가 되어 내 삶의 수직선을 촘촘하게 채워 줄 것이다. 1994년 여름, 그 옛날 제시와 셀린느는 한 기차 안에서의 만남을 낭비하지 않고 그 순간안에 머물며 일생 일대의 로맨스를 경험했다. 2003년의 파리에서는 극적인 재회의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고 상실 가득한 현재를 보상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제시와 셀린느가 있었다. 2012년. 애써야 간신히 로맨틱한 반나절 정도가 확보될까 말까한 제시와 셀린느는 이제 저녁 노을의 의미를 알게 된다. 2020년. 이 들의 사랑이 지나온 길을 바라보며 내 삶의 순간이 나를 붙잡을 때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