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
30대 초반의 나이에, 뉴욕에서 자기집을 소유할 정도로 작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8년동안 남보기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여자가 어느 날 밤 갑작스레 질식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눌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한번도 가보지 못한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자신이 몰두하며 살아왔던 그 삶 속에서 더 이상 자신을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죠. 그녀는 왜 그런 상황에 빠져들었던 걸까요? 그리고 일상을 벗어던지고 떠난 낯선 곳에서 그녀는 무엇을 찾았을 까요?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지만 그녀의 판단이 마냥 부러움의 대상이기만 해야 할까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들여다 보며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영화의 큰 뼈대는 이렇습니다. 34세의 리즈 길버트는 작가로서 성공적인 길을 걸으며 8년간의 결혼생활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밤, 삶의 위기가 찾아오고, 자신을 모두 잃어버린것 같은 기분에 혼란과 좌절에 빠집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을 모두 빨아들인 것 같은 현실을 벗어나고자 이혼을 결정하고, 남편곁을 떠납니다.
그 무엇에도 의미를 찾지 못하고 한동안 친구집에 머물던 리즈는 자신이 쓴 대본으로 상연하던 연극의 주연배우와 잠시 함께 지내게 되지만 그의 곁에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결국 그와도 헤어지고 그길로 이탈리아로 건너가죠.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다시 먹는 것의 즐거움을 찾게 된 리즈는 그 이후 인도로 건너가 영적인 명상을 통해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마지막으로 발리로 찾아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균형상태를 추구하며 동시에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원작인 소설과 같은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EAT PRAY L0VE 즉,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제목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 속 이야기는 제목에 달린 동사의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왜 이 순서대로 리즈는 여행을 한 것일까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사람이 만일 밥을 잘 먹지 못한다면, 생각을 잘 할 수도 사랑을 잘 할 수도 도 잠을 잘 잘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건강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안에 담겨있는 정신이 건강하게 작동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차원적이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철학적 사상을 가진 세계적인 철학자도 자신의 고매한 정신세계를 작동시키려면 가장 일차원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것, 즉 음식을 섭취하여 자신의 육체에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하는 일을 선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먹어야 한다면 생존을 위해 무미건조하게 습관적으로 먹기보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행복하게 즐겨야 먹는 행위의 다음에 이어질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사유의 행위에 보다 의욕적이고 적극적으로 몰입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보면 일상에서 자신을 잃어버려 절망에 빠진 리즈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나라 이탈리아의 푸짐함이 자신을 재정립하는 데에 꼭 필요한 선행조건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몸에 에너지를 불어넣어야 자신의 영혼을 돌볼 힘이 생겨날 테니 말이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아마도 가장 마음에 와닿은 부분 중 하나가 이탈리아에서 유적지를 방문하며 얻은 리즈의 소회일 것입니다. 유적지에서 리즈는 자신의 삶이 온통 무너져 내린 처참한 폐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000년전의 영광도 폐허로 변해 온데 간데 없는 그곳에 앉아, 폐허라는 것이야 말로 또 다른 영광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임을 깨닫습니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면 절대 가지지 못할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는, 결국 과거를 버려야 가능하다는 것, 철저하게 과거를 무너뜨리고 없애면 없앨수록, 더 많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폐허를 쓸모가 사라진 흔적으로 보느냐,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보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결국 인식의 패러다임을 바꿔야만이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가 부여됨을 직관적으로 알게 해준 명장면 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맛있는 음식과 유쾌하고 다정한 친구들 덕분에 외적 에너지를 되찾은 리즈이지만,명상과 기도를 통해 막상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자신의 삶을 구원하고자 남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자신에 대한 책망과 증오가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기 쉽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삶은 좀처럼 나아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인도의 아쉬람에서 만난 미국인 친구 리차드의 자기고백은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기 고백끝에 리차드는 말했죠. 자신을 용서해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죠.
리즈는 결국 상상속에서 자신의 남편 스티븐을 불러냅니다. 한때는 너무나 사랑했고, 자신을 웃게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리즈에게 받은 상처로 초라하게 작아져버린 그. 상상속의 스티븐에게 리즈는 말합니다. "난 당신을 사랑했었다고. 내가 그리우면 그냥 그리워해. 날 아직도 사랑한다면 그냥 사랑해. 그 감정이 끝날 때까지. "
리즈는 어쩌면 자신의 갑작스러운 위기에 압도당해 그가 온당히 들어야 할 말을 해주지 못하고 떠나온 것에 죄책감을 느꼈는 지도 모릅니다. 마치 스티븐이 그녀의 삶을 망치기만 한 인물처럼 만들어버리고 떠나왔기 때문이죠. 스티븐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은 리즈에게 있어서는 원죄의 필연적 결과물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리즈는 스티븐과의 삶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녀가 상상속 스티븐에게 말했듯, 일방적인 감정은 응답받지 못하기에 시간이 지나면 결국 소진되어 사라져버립니다. 리즈는 스티븐과의 삶에서 이미 그에 대한 감정을 상실해버렸고,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껍데기뿐인 일상을 살아오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자신을 느끼지 못하며 삶의 위기를 느꼈습니다. 여기에서 발생한 그녀의 원죄는 스티븐의 감정을 파악하지 않은 채 자신의 감정상태에만 충실하여 스티븐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그녀의 이기주의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인해 자신은 자책과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죠. 뿐만 아니라 그렇게나 원했던 자신의 과거와의 단절역시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던 그녀는 자신의 원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논리와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죄책감이 덜어지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생겨나 자신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고, 마침내 과거와의 진정한 단절을 통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죠. 스티븐과의 상상속 조우는 이렇게 그녀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리즈로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상처를 준 스티븐에게 미안함과 위로를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에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길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위기에 봉착하면 누구나 리즈와 같은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이기에 자신의 이기적인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고통을 초래한 결과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어찌보면 끝없이 반복되는 이런 악순환에서 살아남는 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일일 것입니다. 확신에 찬 이유로 자신을 설득하고 나서야 자신에 대한 용서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용서는 결국 자신과의 합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며 그 합의로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도 짧지도 않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에 함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 리즈에게 이혼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매우 합당한 조치처럼 여겨졌습니다. 리즈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죠. 리즈의 이런 생각은 발리에서도 계속되어 새로운 사랑에 빠져드는 자신을 강제로 제어하려고 합니다. 사랑이 자신의 인생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자신이 주도하던 세상의 균형이 흔들려 또다시 혼란과 좌절에 빠질까 두려워서 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리즈가 생각하는 삶의 균형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쌓아올려 만든 세상에 타인이 침입하여 자신이 애써 정립한 질서가 깨지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자신을 흔드는 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의 개입을 상수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 사회는, 시작할 때에는 한두명이 만든 질서로 유지되나 새로운 구성원이 유입되면 그에 따라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고 새로운 체제를 갖게됩니다. 새로운 체제를 위해서 구체제는 일부가 변경되어 종국에는 누구나 따르고 이해하는 새로운 질서와 체제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죠. 그리고 이 과정이 점점 확대되어가며 끝없이 반복되며 사회는 유지됩니다. 인간의 삶도 사회의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낡은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위해 떠났던 자아성찰의 여행에서 결국 최종적으로 깨닫고 수용해야 하는 것이 바로 끊임없이 동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 삶의 매커니즘이었던 것입니다. 리즈의 스승이었던 케투의 현명한 말처럼 “때로 사랑을 위해 균형을 잃는 것도 커다란 균형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결국 삶의 균형이란 그 무엇에도 흔들림없이 잔잔한 수평을 유지하기위해 발생하는 모든 요소들을 억눌러 변화를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예측 불가능한 동적인 요소들을 수용하여 그것을 예측가능한 정적 요소로 안착시키는 과정의 끊임없는 반복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 삶의 묘미는 이 끊임없는 과정에서 자신이 발휘하게 될 순간 순간의 기지를 즐기며, 계획하지 않았던 수 많은 방법을 사용하나 결국 목표하는 단 하나의 지점을 지향하고 도달하며 느끼는 행복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