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 (2016)
어느 오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방안을 바라본 적이 있으신가요. 늘상 내가 머무르고 생활하는 나의 공간이라 특별하게 관심을 두고 바라보지 않았던 그 공간이 이 날 만큼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벽에 박혀있는 몇 개의 못중 하나가 다른 것과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도 있고,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에 자그마한 얼룩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천장에 달려있는 전등이 새삼스레 타원형이라는 것을 알게 될 수 도 있죠.
내 삶에 일상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들은 내가 내 삶에 파묻혀 시선을 주지 않을 때에는 조명밖에 밀려난 조연들처럼 존재감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지만, 일단 그들에게 시선을 주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나와 함께 조명을 받으며, 그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내 삶은 나 혼자 채워나가야 할 외로운 이차원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어우러져 채워지는 다차원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일상 속 다차원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패터슨은 2016년에 나온 드라마 영화입니다. 감독, 각본은 짐 자무시, 주연은 아담 드라이버와 골쉬프테 파라하니가 맡았습니다.
감독인 짐 자무시는 1953년생 미국 출신으로 1980년대 중반 뉴욕 인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입니다. 원래 시인이 되고 싶은 컬럼비아 대학교 문화부 전공인 학생이었던 그의 전력은 영화에 나오는 많은 예술가들과 시인들에 대한 지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1983년에 저예산 3부작 단편영화 ‘천국보다 낯선’으로 화려한 데뷔를 한 후, 다운 바이 로우(1986), 커피와 담배 연작(1986, 1988), 브로큰 플라워(2005),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 데드 돈 다이(2019)등의 작품이 있고, 본인이 직접 출연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가 있습니다.
패터슨 역의 아담 드라이버는 1983년생의 미국 배우로 9.11 사태 이후 해병대에 복무한 이력과 줄리어드 스쿨에 떨어졌다가 두 번째 도전으로 입학한 특이한 전력으로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이런 전력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영어공부에 가장 잘 이용되는 TED에 나와서도 어떻게 해병대에서 배우가 되었는지의 과정에 대해서 강연을 하기도 했었죠. 배우로서는 다소 특이한 외모와 독특한 걸음걸이를 지녔지만, 그의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 높은 연기로 인해, 이런 외모가 오히려 강점으로 돋보이기까지 합니다.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는 효과를 주는 셈이죠. 주요 작품을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2012-2017년에 출연한 TV 드라마 “Girls”, 영화로는 2014년 노아 바움벡 감독의 “While We’re Young”, 2015-2017 스타워즈, 2016년 패터슨, 2017년 로건 럭키, 2018년 블랙 클랜스맨,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2019년 데드 돈다이, 결혼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패터슨의 아내 로라 역은 1983년생의 이란 출신의 배우이자 가수인 골쉬프테 파라하니가 맡았습니다. 이미 14세에 여우 주연상을 받을 정도의 실력을 보인 골쉬프테는 그 이후 활발한 활동을 하며 2012년 “The Patience Stone”, 2015년에는 루이 가렐이 감독한 “두 친구”, 에 출연하였고, 2016년 패터슨, 2017년 캐러비안의 해적, 2020년 토르의 크리스 헴스워드와 함께 “Extraction”등에 출연했습니다. 다만 그녀가 2008년에 출연한 영화 “Body of Lies”, 2012년에 촬영한 마담 피가로 잡지와, 장 밥티스트 몽디노의 사진작품 속에서의 노출 등으로 인해 보수적인 아랍문화를 가진 자국 내에서 논쟁을 불러와 본국에서의 활동이 제약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는 프랑스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도시 패터슨에 살며, 도시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패터슨은 신비한 외모를 지닌 아름다운 부인 로라와 마빈이라는 이름의 잉글리쉬 불독과 함께 장난감 같은 작고 아담한 집에서 살며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버스기사입니다. 영화는 패터슨의 월요일부터 다음 주 월요일까지의 일주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부인과 잠들어있는 모습의 패터슨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거의 정확한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면, 주방으로 가서 시리얼을 먹고 부인인 로라가 싸놓은 점심 도시락이 들어있는 작은 철제 가방을 손에 쥐고 집을 나와 걸어서 일터인 버스회사로 향합니다. 시리얼을 먹다 식탁에 놓여있는 작은 성냥갑을 손에 쥐고 만지작 거리던 패터슨의 머리에는 그 성냥갑을 모티브로 한 시구가 떠오릅니다. 단순하게 성냥갑과 성냥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시는 어느새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는 내용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게 여느 날처럼 마을을 돌며, 얼핏 얼핏 들리는 승객들의 그날 그날 다른 이야기들을 들으며 운전을 하다 보면 하루는 끝이 나고, 출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동네를 걸어서 집으로 오면 이상하게 기울어져 있는 우편함을 똑바로 고정하고 집으로 들어서고,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나면 늘 그렇듯 마빈과 함께 저녁 산책길에 나섭니다. 저녁 산책에서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은 마을의 단골 바에 들려 바텐더인 닥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 한잔을 비우는 것이죠. 그렇게 비워져 가는 맥주잔을 응시하며 그의 하루는 끝이 납니다.
아내인 로라가 꾸었다는 쌍둥이 꿈 이야기를 듣고 하루를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그의 일상에는 쌍둥이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인식하고 나서야 쌍둥이가 더 눈에 띄는 것 같은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의 성냥갑에 관련한 시는 결국 사랑 시가 되어가고, 그렇게 운전하는 동안에도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틈틈이 그는 시를 생각하고 시를 써내려 갑니다. 퇴근하고 나서도 자신의 지하 작업장이자 서재인 지하실에서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을 곁에 두고 낮에 못다 한 시를 써 내려갑니다. 그의 시 쓰기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언제든 상황이 발생하면 중단되기 십상이죠. 그의 시를 사랑하는 아내는 예전부터 그에게 비밀 공책에 적어 놓은 시들을 복사해 놓으라고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분실될까 봐 몹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에 패터슨은 주말에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을 합니다. 이렇게 남편의 약속을 받아낸 패터슨의 아내는 패터슨의 허락을 얻어 기타를 구입해 컨트리음악을 하고자 하는 본인의 소원을 이루기도 합니다. 또다시 나선 저녁 산책길에서는 빨래방에서 래퍼가 되기 위해 남몰래 연습하는 남자를 보기도 하고, 낯선 젊은이들이 컨버터블카에서 말을 건네기도 하는 등 작지만 다른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며 늘상 같을 것만 같은 그의 산책길에 변화를 주죠. 자신의 단골 바에서는 바텐더인 닥이 자신만의 명예의 전당에 올릴 사람을 두고 패터슨에게 자문을 구하는가 하면 이 동네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놀림받는 커플이 등장하여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듭니다. 이렇게 연이은 소소한 사건들이 그의 일상을 채워나가던 어느 날 패터슨에게 획기적인 사건이 터집니다. 부인과 모처럼 외출해서 영화를 보고 오던 날 밤, 혼자 집에 있던 마빈이 패터슨의 비밀 공책을 물어뜯어서 갈가리 찢어버린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자신의 시가 담긴 공책을 잃게 된 패터슨은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산책을 나가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폭포를 보며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일본인 시인이 나타나 패터슨과 시와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더니 시를 쓰라며 새 공책 한 권을 선물하고 홀연히 떠납니다. 그 공책을 손에 받아 들고 잠시 공책의 빈 페이지를 응시하던 패터슨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를 써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일주일이 다시 시작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유난히 빨간색 코트가 입고 싶던 어느 겨울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 누군가가 입고 지나가던 그 코트가 어찌나 마음에 남던지 말이죠. 그 이후 이상하게 눈에 자주 띄던 빨간색 코트. 제 일상에 그렇게나 많은 빨간색 코트가 있었다는 것을 그 겨울 내내 깨달으며 어쩌면 그것은 지나치게 코트에 집착한 저의 편집증적 탐욕이 불러일으킨 환상 같은 게 아닌가 싶어 제 자신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험은 영화 패터슨에 의해 다른 차원에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패터슨의 아내 로라는 출근하기 전 패터슨에게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날 그녀가 꾼 쌍둥이 꿈 이야기는 그 이후 패터슨의 삶에 마법 같은 일을 만들어냅니다. 즉, 쌍둥이라는 단어를 듣고 출근 한 그날부터 그의 눈에는 전에는 잘 인식하지 못했던 쌍둥이들이 그의 일상 도처에서 눈에 띄는 일이 생긴 것이죠. 그의 아내 로라가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렇게나 많은 쌍둥이들이 어디에서 한꺼번에 나타난 걸까요? 이전에는 아예 없었을 까요? 답을 내려보자면 그렇다/아니다 둘 다 해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쌍둥이들은 이미 그 마을에 존재하고 있었으나 단지 패터슨의 인식 안에 없었을 뿐이었을 테니 말이죠. 우리가 익숙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사실 우리가 이미 인식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틀 안에서 살아가며 그 안에 서서만 머물기 때문에 익숙함을 느끼거나 때로는 지루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위를 넓혀 우주 전체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스스로 규정한 이 인식의 틀은 전체 우주에서 아주 하찮은 일부분의 영역일 뿐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우리의 인식으로만 둘러싸인 우리의 삶 바깥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들이 무한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 규정하여 속박되어 살고 있는 우리가 인식의 틀 안으로 바깥쪽의 것들을 하나씩 집어넣는다면 우리가 받아들인 그 양만큼 우리의 인식의 틀, 즉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의 범위도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일상이 답답하게 느껴진 다면 그때가 바로 우리의 인식의 틀을 넓혀 일상의 범위를 넓힐 때일 것입니다.
걷기는 내면으로의 여행이고 자기와의 대면이다. 걷다 보면 자기밖에 전개되는 풍경과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들이 자기 안의 자기에게 말을 건네 온다. 그래서 평소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된다. 걷기는 자기를 비우고 버리면서 다른 사물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시인은 그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는 존재다. 그 소리와의 대화가 시가 된다. – 도시 걷기의 인문학, 정수복
영화에서 주인공 패터슨의 출퇴근길을 생각해 볼까요. 그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이 든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 아침의 태양이 건물을 서서히 물들이는 걸 바라보며 터덜터덜 걸어서 직장으로 출근을 합니다. 태양이 물러가는 걸 느끼며 퇴근을 하고, 퇴근 후에는 마빈과 산책을 하며 동네를 걸어서 돌아다닙니다. 자신의 일상에서 눈에 띄는 작은 것들에서 시를 느끼는 그에게, 걷기란 24시간이라는 자전 시간에 맞춰 고동치는 지구의 맥박을 자신의 두 발로 짚어 그 맥박을 느끼는 행위처럼 보입니다. 멋없고 불편해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위한 가장 멋진 수단을 가진 셈입니다. 빠르게 지나가면 놓쳐버릴 수 있는 태양빛의 미세한 변화, 동네 아이들의 아이다운 수다, 놀이터 옆 상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저마다 다른 생각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술집의 벽에 붙은 오래된 사진들은 멈춰 서서 시선을 주고 의식을 하는 그 짧은 순간이 있어야만 그 안에 담긴 섬세한 다양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보고, 매일 지나다니지만 그렇다고 매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우리의 일상. 그 일상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우리의 두 발이 필요합니다. 뚜벅뚜벅 일상 속을 거닐며 느리지만 찬찬히 내 주변을 바라볼 때야 비로소 우리는 일상의 찬연한 무지개 빛을 만나게 될 테니까 말이죠.
2011년 작 미드 나잇 인 파리는 1920년대 파리에 살며 문학의 길에 막 접어들던 청년 헤밍웨이와 당대의 예술가들에 대한 감독의 오마주가 가장 큰 축이 되었던 영화입니다. 감독인 우디 알렌은 이를 위해 주인공인 길의 행적에 1920년대 당시의 헤밍웨이의 행적을 절묘하게 오버랩시켜 영화적 상상력과 완성도를 극대화시켰습니다. 2016년작 패터슨에서도 주인공인 버스기사 패터슨의 행적은 사실 감독인 짐 자무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삶의 행적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패터슨 시에서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도시 러더포드에서 태어나 평생 러더포드의 자연과 퍼세익 강을 사랑했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동네를 안팎을 걸어 다니며 남달리 관찰을 열심히 했던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동네에 흐르던 퍼세익 강은 그가 어릴 때부터 너무나 좋아하던 강으로 어린 시절엔 간혹 강가에 누워 강물의 멋진 선율을 들으며 낮잠을 자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퍼세익강은 그가 평생 시를 쓰는 데에 많은 영감을 주어서, 언제든 시를 쓸 때면 퍼세익강물의 리듬과 그 생명력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사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전업작가가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40여 년간 마을에서 가정의로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매일 오전 윌리엄스는 자신의 차에 약품과 의료기구를 잔뜩 넣은 검은 가방을 싣고 환자들의 집을 방문하여 진료를 했고 오후에는 병원에서 계속해서 진료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고된 하루였지만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처방전 용지에다 시 몇 줄씩을 흘려 쓰곤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과가 끝나고 다들 잠들 무렵이 되면 자신의 서재였던 다락방으로 올라가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적기도 하고, 노트에 적어놓은 시들을 타이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윌리엄스는 늘 자신이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물들, 주변 환경에 큰 관심을 두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시를 썼고, 거의 매일 시를 썼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여 권의 시집과 여러 권의 산문집 희곡집 단편소설집을 출간한 이후인 60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듯 윌리엄스의 삶을 알고 나니 짐 자무시 감독이 어떤 구상으로 패터슨이라는 주인공을 창조해 내었는지 조금을 알 것도 같지 않으신가요. 아침마다 환자를 치료하러 커다란 가방을 차에 싣고 나가는 윌리엄스와, 아침마다 승객을 태우기 위해 작은 도시락 가방을 들고나가는 패터슨. 하루 종일 고된 일상에 시달려도 늘 시를 잊지 않고 조금의 짬이 생기면 비밀노트나 빈 종이를 찾아 시를 적는 두 사람.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일상에 관심을 갖고, 그 속에 담긴 시를 찾아냈고, 자신의 일과가 끝나면 그제서야 자신의 시를 탄생시킬 수 있는 공간에서 비밀노트에 시를 쓰는 두 사람. 무엇보다 퍼세익 강물과 퍼세익 폭포를 사랑하는 윌리엄스와 패터슨. 이렇게 큰 구조를 생각해보니, 미드 나잇 인 파리처럼 패터슨 역시 감독이 위대한 미국의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행적을 주인공인 패터슨의 행적에 고스란히 반영하여 오버랩했음을 아실 수 있으시겠죠. 어쩌면 감독은 이런 오버랩을 통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보편화시켜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윌리엄스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일상속에 감춰진 시를 찾아낼 수 있는 한
영화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시를 적던 공책을 잃어버린 패터슨은 자신이 좋아하는 퍼세익 폭포에 망연자실 앉아있습니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일본인 관광객이 빈 공책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더 많은 가능성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고 말이죠.
공책의 텅 빈 페이지를 바라보자니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텅 빈 일상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전부 비워져 있는 공책이 나에게 채우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듯,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일상은 역설적으로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고, 따라서 그 무엇으로든 될 수 있는 잠재력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범해 보이는 나와 내 일상 안에는 굉장한 미래가 담겨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과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아껴주어야 할 이유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