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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Nov 04. 2023

너는 나의 뿌리였다

영화 <여덟 개의 산> (2022)

생이란 무엇일까. 복잡다단한 철학적 사유는 우리에게 생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겠으나, 단지 유한한 기간과 몇 개의 장소, 몇 번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생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한한 기간 중 어떤 기간이 우리에게 가장 결정적이고 의미 있는 기간일까? 어떤 장소에서 우리는 강력한 끌림을 갖게 되는 걸까? 어떤 관계에서 우리는 정착의 욕구를 갖게 될까? 영화 <여덟 개의 산>은  이처럼 우리에게 생에 대한 재고와 그 의미를 묻게 한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파올로 고녜티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2016년에 발표한 동명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여덟 개의 산>은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당시 칸 영화제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박찬욱 감독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들이 함께 출품되었으나 섬세한 디렉팅, 압도적인 풍광, 울림을 주는 메시지와 주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넘어 심사위원상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벨기에 출신의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부부 감독의 공동 연출과 각본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칸 영화제를 시작으로 제39회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 제68회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수상 등의 행보를 통해 본격적으로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나의 삶은 어디에 속하는 가



영화의 제목인 <여덟 개의 산>이란 무슨 의미일까. 네팔인들이 믿는 불교에 따르면 세상은 중심에 있는 수미산과 바다로 나뉘어진 여덟 개의 산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네팔을 여행하며 이 것을 들은 피에트로는 자신을 여덟 개의 산을 여행하며 세상을 알려고 하는 자라고 생각하는 반면, 브루노는 자신을 중심에 있는 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중심부의 산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산의 정상에 올라 생을 내려다보는 자와 끊임없이 이 산 저산을 옮겨 다니며 생의 의미를 찾는 자. 우리는 어떤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을 살아내고 있는 걸까.


영화가 끝나고 화면을 타고 올라가는 엔딩타이틀이 끝날 무렵까지 나는 이 한 가지 질문에 붙들려 있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걸까. 피에트로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혹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 지금도 여행 중인가, 아니면 내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브루노처럼 나에게 맞는 곳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영화에 등장하는 한그루의 작은 나무를 떠올리게 되었다. 


피에트로와 브루노가 함께 집을 지을 무렵 그들은 어디에선가 작은 나무 한그루를 가져와 집 앞에 옮겨 심었다. 이 나무가 살아서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피에트로의 질문에 브루노는 태어난 곳에서는 강하지만 옮겨 심으면 죽기가 십상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브루노의 예상과는 달리 그 작고 여린 나무는 끝내 험한 지형과 기후를 홀로 견디며 살아남는다. 



우리의 생은 어쩌면 이 나무와 같지 않을까 싶었다. 브루노처럼 드문 행운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정상에 올라 생을 관조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들은 여덟 개의 산을 끝없이 돌며 생을 겪어내고 있지는 않을까. 그 힘들고 지난한 삶의 여정은 자주 우리에게 좌절을 안겨주겠지만, 작은 나무가 그랬듯 우리 역시 어느 날 발 디딘 새로운 땅에서 무던하게 땅을 파고들어 마침내 고단한 여정을 끝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 삶에는 정답이 없고 정착 역시 한시적일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당신은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가.


누구나 나만의 브루노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



피에트로가 브루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니 브루노는 피에트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두 사람의 관계와 삶은 우리에게 삶의 한 시기에 우리가 형성하게 되는 관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의미 있는 타인은 그의 존재방식을 통해 정확한 삶의 장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그라는 거울을 통해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를 겪기 이전과 이후는 이렇게 차원을 달리하며 우리를 성장시킨다. 


영화 속 브루노의 모습은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브루노는 꾸미지 않으나 감동을 주고, 애써 남을 이롭게 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으며, 태어난 모습 그대로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간다. 배움은 적지만 언어가 한 사람의 세상을 규정하고 확장시킨다는 것을 알 정도로 명민하며, 인간의 삶은 결국 다시 자연의 품으로 산화되어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철학적 깊이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빌딩이 빼곡히 들어선 도시에서 추상적 언어와 절망이 뒤범벅된 꿈에 짓눌려 살던 피에트로에게 브루노가 갖는 이러한 자연성은 대자연 앞에 선 인간이 그러하듯 그를 압도하며 결국 피에트로에게 자신만의 자연성을 찾는 여정을 떠나게 만든다.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 운 좋게 만나 한 시기 나의 생을 함께 가주며 나의 뒤에서 나를 밀어주고 지켜주는 나만의 타인. 일생에 한번 우리에게는 이러한 타인이 필요하다. 피에트로에게 브루노가 있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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