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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 에세이스트 J Nov 25. 2023

상실의 조각으로 희망의 탑을 쌓다

영화 <스크래퍼, 2023>

누군가와의 이별은 그것이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남겨진 자에게 상처를 남긴다. 떠난 자와의 관계에 따라 상처의 깊이와 회복까지의 시간이 달라질 뿐이다. 


흔히들 사랑이 떠나면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가 가능하며 시간이 약이 되어준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말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반이라도 맞다고 보는 건 시간의 경과가 우리의 감정과 기억을 둔탁하고 흐릿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확실하며, 새로운 사랑의 등장은 분명 지난 사랑의 아픔에 빼앗길 에너지를 분산 혹은 전환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머지 반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이전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이 누적되어 질뿐 이거니와, 새로운 사랑 역시 이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제 몸에 맞는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내는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떠나고 사람이 떠나고 시간이 덮이고 기억이 가뭇해져도 상실은 우리를 여전히 아프게 하는 것이다. 아픔을 상수로 포용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그리하여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현존하는 아픔과 타협하고, 현재 하는 불안함을 달래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법"을 배우는 일일 것이다. 



영화 <스크래퍼>는 영국의 신예 감독인 샬롯 리건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찍기 전 이미 수백 편의 뮤직 비디오를 제작해 왔으며 단편 영화를 통해 국제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주목을 받아왔던 샬롯 리건 감독의 천부적이고 노련한 센스와 유머 감각은 자신의 첫 장편영화라는 이 영화의 곳곳에서 우리를 매료시킨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데뷔하게 된 주인공 조지역의 롤라 캠벨과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슬픔의 삼각형'등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해리스 디킨슨의 케미스트리는 자칫 진부하고 최루적인 영화가 될 뻔한 <스크래퍼>에 매우 힙한 감동을 더해준다. 


1. 슬픔도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자신의 저서 <죽음과 죽어감>에서 인간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인지하기까지의 과정을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의 5단계로 분류한 모델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 모델은 그 후 죽음에 대한 상황뿐 아니라 슬픔이나 애도, 상실의 상황에서도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영화 <스크래퍼>의 조지 역시 이 5단계를 적어 벽에 붙여두고 자신의 슬픔이 어디쯤인지를 스스로 가늠한다. 조지 스스로가 느끼는 자신의 단계는 3단계, 즉 타협의 단계였다. 엄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 자리에서 마치 엄마가 살아있는 듯해왔던 그 방식 그대로를 고집하는 어린 소녀의 억척스러운 씩씩함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녀의 여전한 슬픔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 2017>를 통해 무형의 사랑이 실은 수많은 유형의 사랑으로 실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슬픔 역시 그러하다. 수많은 형태, 빛깔, 온도를 지닌 슬픔은 아무 때고 슬퍼하는 자의 마음을 들락거리며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랑이 사람 따라 나이가 들어가듯, 슬픔도 시간에 따라 일으키는 파문의 크기를 좁혀나간다. 그렇게 시간의 다독거림을 받던 슬픔은 어느 날 마침내 우리 마음 작은 구석에 사나운 가시를 스스로 빼버리고 여전한 낯섬으로 자리 잡는다.    


 2. 불완전함은 두 번째 기회를 담보한다

작가 파엘로 코엘료는 "살다 보면 흔히 두 가지 실수를 범한다. 하나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 두 번째는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당연히 불완전하고, 우리의 이러한 불완전함은 갖가지 실수를 통해 증명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실수에 대한 합리적 변명을 위한 논리라기보다는 우리가 범하는 실수의 근본적 원인과 방책을 위한 논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영화 <스크래퍼>에 나오는 젊은 아빠 제이슨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다. 그러나 코엘료 식의 실수로 그의 실수를 놓고 본다면 그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실수를 저지른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실수에는 자신 이외에 또 다른 당사자가 관여되어 있으니, 그의 시도에는 그 혼자만의 결단과 용기뿐 아니라 시도 대상의 결단과 공감이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제이슨이 얻게 된 두 번째 기회는 그래서 실수를 저지른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를 거부함으로써 코엘료 식의 두 번째 실수를 할 수도 있었던 조지에게도 두 번째 기회가 된 것이었다. 

 

3. 탑은 여전하다    

맑은 밤하늘에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난히 영롱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그 별에 닿고 싶어지지는 않는가? 아니 그 별을 그대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영화 <스크래퍼>의 조지는 엄마가 죽고 난 후 엄마가 쓰던 방에 온갖 조각들을 모아 놓고 그것으로 탑을 쌓기 시작한다. 하늘나라로 갈 거라는 엄마의 말을 그대로 믿었을 리 만무하지만, 조금씩 높아가는 탑에 올라서면 지상에 놓여있는 자신의 슬픔은 작아 보이고 엄마가 있는 하늘에는 좀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영화는 제이슨과 함께 살게 되면서 엄마와 살던 공간을 새롭게 바꾸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러니 당연하게도 엄마방에 있었던 조각들로 만들었던 탑도 치웠겠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향한 조지의 작은 탑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을까? 


방에 쌓았던 탑은 사라졌어도 조지의 탑은 여전히 조지의 마음에서 쌓여가고 있지 않을까. 아빠가 생겼다고 사라지지 않을 엄마의 자리, 엄마를 향한 조지의 마음은 엄마를 다시 만날 그날까지 영원히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별을 향한 마음을 가슴에 품으면 그 별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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