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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y 31. 2021

이 건은 결재 못 하겠는데?

내가 만난 최고의 상사

“이 건은 결재 못 하겠는데?”


팀장님이 나지막하게 던진 뜻밖의 한마디에 하마터면 눈물방울이 맺힐 뻔했다. 방금 팀장님께 사직서 결재를 요청한 참이다. 내 퇴사 의사는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 많은 의미를 내포한 한마디였다. 평소 말씀이 많거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라 그 울림은 더욱 컸다. 팀장님은 마지막까지 더없이 멋진 분이셨다


임시 칸막이로 구분한 화장실이 딸린 고시원에서 살다가 욕실과 생활공간이 분리된 원룸으로 이사를 한다. 몇 년 후, 이번에는 방 두 개에 거실이 있는 빌라로 이사했다가, 마침내 방 세 개에 발코니가 딸린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원룸 생활로 다시 돌아간다면? 영문도 모르는 상황에 큰 충격을 받고 거세게 현실을 부정할 것이다.


나에게 팀장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살던 아파트 같은 분이셨다. 첫 번째 회사에서 책에 나올 법한 유능한 상사를 만난 덕분에 이후 다른 곳에서 이어온 회사 생활은 약간 불행해졌다. 좋은 사람, 좋은 물건, 좋은 서비스에는 금세 익숙해지고, 그만큼 눈은 높아지며, 욕망은 커지기 마련이다. 지금껏 거쳐온 다른 상사들도 리더십을 발휘하고자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유능한 상사는 드물었다. 많은 이들이 바라는 방 세 개 아파트는 기본도 아니고, 누구나 당연하게 가질 수 있지도 않았다. 이 혼란스러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는데, 좋은 리더가 남긴 부작용이었다.




팀장님은 출근을 일찍 하는 대신 퇴근도 일찍 하셨다. 아침에 사무실에 도착하면 팀장님은 이미 창가에 놓인 자신의 책상에서 한창 신문을 읽고 계셨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5분 정도 먼저 ‘안녕’이라고 작별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서곤 하셨다. 팀장님이 자리에 계시더라도 퇴근 시간이 되면 인사 뒤 사무실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팀장님의 5분 센스 덕분에 팀원 모두 마음 놓고 5분 동안 업무를 마무리하고 자리 정돈을 한 뒤 정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


팀장님은 미식가라서 같이 근무하는 동안 맛있고 좋은 음식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한번은 회사가 있는 화양동에서 다리 건너 청담동에 가서 장어구이 회식을 했는데, 생선살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을 알게 되었다. 왜 맛있다고 하는지 한동안 이해 가지 않던 심심한 평양냉면도 어린이대공원 후문에 있는 서북면옥에서 이때 처음 맛보았다.


회사 근처가 대학가라서 프랜차이즈나 유행을 타는 음식점이 많았다. 이런 환경에서도 팀장님은신선한 재료를 고수하고 오랜 요리 비법을 자랑하는 ‘진짜 맛집’을 기가 막히게 발굴했다. 팀 워크 다지기라는 다분히 목적 지향적이고 일종의 의무사항인 팀점은 썩 달갑지 않다. 그러나 음식점을 선정하는 팀장님의 안목은 탁월했기에 그가 ‘다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라고 할 때는 망설이거나 팀점에 참석하지 못하는 구차한 이유를 둘러댈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닌데 경험 삼아 먹을 만하다’라거나 ‘입맛에 맞지 않는데도 맛있다’라고 착한 거짓말을 하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고역을 겪지 않았다. 회사원에게 점심시간은 공식적으로 용인 받은 귀중한 해방구이다. 하루 중 이 시간을 얼마나 목놓아 기다리는지 알고 있다면, 팀점을 고대하는 환경은 회사원에게 축복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있으면 더욱 좋지만 없어도 크게 상관없는 운 좋게 주어진 부수적인 ‘혜택’이다. 좋은 상사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아니다. 냉정하게 한여름에 맛있는 아이스커피 없이는 살아갈 수 있지만 시원한 에어컨이나 선풍기 없이는 무더위를 견디기 어렵다. 한겨울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따뜻한 도시가스 난방은 필수이다. 유능한 팀장님은 팀원들이 한여름 무더위와 한겨울 강추위를 피하도록 팀을 운영하면서 때때로 아이스커피도 제공하고, 크리스마스트리도 함께 즐기도록 하는 사람이었다. 리더이자 상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잘 수행했다.


우선, 부서원들이 현재 무슨 일을 중점적으로 하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진행하는지 잘 파악했다. 나아가 부서원이 주어진 업무를 해결하고자 무슨 고민을 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막혀서 업무 진행을 못 하고 고전하는지 알아채서 적절한 조치를 했다.


한번은 국내외 주요 의료 기관에서 운영하는 헬스케어센터(건강검진센터) 사례를 조사하는 업무를 했다. 국내 사례는 수월하게 조사를 마쳤는데 해외 사례는 광범위하고 사전 지식이 없어서 어디부터 시작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팀장님이 잘되고 있느냐고 묻더니,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메이오 클리닉 사이트에 접속하자 내가 찾던 정보로 가득했고,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말단 사원이라 팀장님이 내 업무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는 표정에서 드러난 내 고민을 읽어내고 적절히 개입했다. 군더더기 없이 버릴 것 없는 팀장님의 한마디는 업무를 처리하는 데 실질적으로 유용했고 도움을 주었다. 팀장님이 말과 행동으로 실력을 입증하자 팀원들은 그에게 권위를 부여했고, 신뢰할 수 있는 리더로서 팀장님의 의견을 존중했다. 팀장님이 지시한 업무는 집중해서 능력이 닿는 한 잘 해내고 싶었다. 그의 인정은 나에게 그럴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


부서원의 업무와 업무 진행 상항 파악은 부서장의 기본 업무이다.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기초적인 당연한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사를 알았을 때 몹시 충격을 받았다. 회의 내용을 전달만 할 뿐 방향 제시는커녕 전혀 일하지 않는 깔때기형 상사를 만났을 때는 지독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서 근로 의욕이 곤두박질쳤다. 사방이 가로막힌 답답한 방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절망했다. 




팀장님은 팀원의 보고 사항을 빠르고 명쾌하게 피드백했다. 팀장님이 답변을 주저하거나 회피해서 업무 진행에 차질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부서원은 업무를 자율적으로 진행하되 진행 속도가 지지부진하거나 업무 완성도가 떨어지면 팀장님은 나에게 메이오 클리닉을 찾아보라고 했듯이 알아채고 적절하게 개입했다. 예를 들면, 콕 집어서 특정 거래처와 업무를 진행하라거나 어떤 부분을 배제하고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하는 방식으로 업무 진행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유관 업체나 기관의 담당자가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억지를 부려서 부서원이 고전하면 즉각 상황을 파악했다. ‘그 사람은 신경 쓰지 말라’라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라며 팀원이 느낀 압박감을 덜어주고, 새로운 방향성을 일러주었다.


실리를 추구해 불필요한 회의를 열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자신의 체면 때문에 보여주기식으로 동원하는 상황에 팀원을 참석시키는 일도 기피했다. 실무를 이해하지 못한 현실과 간극이 있는 윗선에서 내린 지시는 에둘러 대응했다. 부서원 입장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지시라고 받아들이는 점을 공감하고 인정했다. 누군가 나서서 떼야 하는 혹 같은 이런 업무는 자신을 제외한 가장 높은 직급의 부서원과 의논해서 가능한 한 두 사람이 직접 처리했다.




이후 회사 몇 개를 더 거치면서 일찍이 롤 모델로 삼을 만한 리더 곁에서 일한 경험은 대단한 행운을 거머쥔 일이었다고 깨달았다. 당시 나는 처음 사회에 발을 디딘 새하얀 도화지 상태일 때라서 그때의 경험과 감정은 더욱 생생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다. 10년 전과 똑같은 팀장님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훌륭한 리더로, 좋은 상사로 제 역할을 하고 계시겠지. 나도 자신에게 주어진 내 몫을 감당할 만한 그릇을 가진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유능한 팀장님처럼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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