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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y 20. 2021

의욕만 앞서면 몸이 고생한다

혹한의 날씨에 벌어진 일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 졸업 전이라 여전히 고등학생 신분이지만 해가 바뀐 뒤에는 스무 살 성인이기도 한 인생에 두 번 다시없을 참으로 자유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운전면허를 취득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한껏 연애에 푹 빠지거나 밤마다 술집을 전전하는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학생과 성인의 경계가 모호한 두 달 남짓한 나날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기, 나는 처음으로 꾸준하게 운동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초등학생 때부터 한동네에 살면서 우정을 이어온 친구 Y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1월 초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드디어 운동 첫째 날의 서막이 올랐다. 운동으로 의기투합한 갓 스무 살이 된 두 소녀는 의지와 열정을 불태웠다. 우리 앞에 고난의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야!(친구 이름)”


약속 시간에 맞춰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한겨울이라 오전 7시여도 아직 밖은 어두웠고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야!(내 이름)”


친구도 손을 흔들며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가볍게 10분 거리에 있는 공원을 한 바퀴 달리기로 했다. ‘방학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친구와 함께 조깅이라니. 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생산적인 일인가. 공원을 한 바퀴 다 돌고 나면 얼마나 상쾌할까’라는 자기 예찬과 장밋빛 상상으로 운동하기 전부터 한껏 들떴다. 표정을 보아하니 설레기는 친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공원 입구에 다다랐고, 우리는 호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힘차게 걸었다.





이내 첫 번째 다리가 나타났다.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라 아직은 둘 다 표정이 밝았다.


“좀 춥긴 해도 정말 상쾌하다, 그치?”


내 말에 친구도


‘응, 일찍 일어나길 잘한 것 같아.”


라고 맞장구를 쳤다.


공원에는 다리가 총 세 개 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다리는 공원 입구에서 멀지 않았다.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도중에 출발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째 다리는 달랐다. 두 번째 다리에서 세 번째 다리는 공원 입구에서 두 번째 다리만큼의 거리보다도 멀었다. 만일, 세 번째 다리까지 다다르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리를 건너서 왔던 거리만큼 그대로 돌아오는 수밖에. 다리를 건너나, 건너지 않거나 어차피 돌아오는 거리는 줄어들지는 않기에 반환점인 다리라도 건너는 게 나았다.


어느덧 우리는 두 번째 다리에 이르렀고, 결단의 시간이 찾아왔다.


“어떡하지?”


친구가 물었다. 추운 날씨에 세 번째 다리까지 운동을 강행할지, 오늘은 여기서 그만둘지를 함축한 질문이었다. 단번에 속뜻을 이해한 걸 보면, 이날 나도 어지간히 추웠나 보다. 하지만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한 바퀴는 돌아야지. 오늘 운동 첫째 날이잖아.”


이라고 대꾸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망설이던 친구도


“그래, 한 바퀴는 돌아야지. 얼른 세 번째 다리까지 가자.”


라고 내 말에 수긍하고 말았다. 이렇게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후회와 미련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세 번째 다리로 향하고는 둘 다 부쩍 말수가 줄어들더니 어느새 아무 말도 없었다. 첫 번째 다리를 건널 때의 해맑음은 온데간데없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운동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이제야 조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는데,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복장에 깜짝 놀랐다. 두꺼운 패딩과 털모자는 기본이고, 얼굴도 목부터 코까지 운동용 넥워머로 가려서 신체 중 외부로 드러난 부분은 두 눈이 유일했다.


반면, 우리는 다리가 길어 보이는 맵시 있는 운동용 바지에 그다지 두껍지 않은 겨울 점퍼를 입고, 머리카락을 질끈 올려 묶은 뒤 트렌디한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강추위에 꼭두새벽 이처럼 얇게 입고 운동을 나온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보였다. 스무 살 소녀들은 실은 건강이라는 운동 본연의 목적보다 ‘운동을 하는 멋있어 보이는 모습’을 갈구했던 것이다. TV에 나오는 예쁜 연예인 언니들이 잘 꾸미고 운동하는 모습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야말로 운동을 1도 모르는 겉멋 들린 운동 무식자 두 사람에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극과 극을 달렸다.


멋도 멋이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운동을 하면 땀이 나서 더울 거야’, ‘운동을 하려면 옷은 좀 가볍게 입는 편이 낫겠지?’라는 잘못된 합리적인 생각으로 자신감 있게 평소보다 옷을 얇게 입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한겨울에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를 맞보는 것으로 겨울철 야외 운동 신고식을 호되게 치렀다.




세 번째 다리를 건너서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추위와의 사투였다. 너무 덜덜 떨어서 새파래진 입술 속으로 윗니와 아랫니가 맞부딪쳐 딱딱 소리를 낼 지경이었다. 멋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고, 머릿속엔 오로지 ‘일단 어떻게든 공원 입구까지 가야 한다’라는 일념뿐이었다. 그렇게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간신히 언 발을 떼고 있는데, 두 손을 겨드랑이에 꼭 낀 채 걷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야!(내 이름), 너무 추워”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목을 쏙 집어넣고 불쌍하게 한껏 웅크린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폭소가 터졌다. 친구의 앞머리에 작은 고드름이 맺혀있는 게 아닌가. 기온이 낮으면 사람 입김으로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황당한 상황에 웃픈 웃음이 멎질 않았다. 친구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인지 아무도 없는 공원에 멈춰 서서 둘 다 한동안 껄껄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거의 남극을 탐험했거나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몰골로 간신히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지금 같으면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일단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한 뒤 가족을 불러서 요금을 지불한다는 등의 생각을 했을 텐데. 그때는 머릿속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간다거나, 피치 못할 상황에 기사님께 양해를 구해서 가족이 대신 택시비를 낸다든가 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내 생각의 범위는 동전 몇 푼이라도 있으면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정도였는데, 이날은 운동한다고 땡전 한 닢 들고 나오지 않은 빈털터리였다.


마침 편의점이 보였다. 들어가서 잠시나마 언 몸을 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우리 편의점 갈까?”, “그럴까? 그런데 우리 돈이 없잖아.”, “눈치 보이려나?”, “좀 눈치 보이긴 한다” 소심한 소녀들은 차마 편의점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길가의 좁은 공중전화부스에 둘이 청승맞게 웅크리고 앉아 언 손이 따뜻해지도록 손바닥을 비비며 입김을 호호 불었다. 그러다 친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놈의 고드름 때문에 또 한번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래도 사방이 막혀있어서인지 공중전화부스 안은 바깥보다는 아주 조금 덜 추웠다. 잠시 몸을 녹이고 기력을 회복한 뒤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집까지 걸어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 날, 운동 이틀째 아침이 밝았다. 약속한 오전 7시에 횡단보도로 갔다. 저건 누구? 맞은편에 어제 본 세련된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육중한 검은 곰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두툼한 패딩 안에 대체 옷을 몇 겹을 껴입었는지 친구의 몸은 집채만큼 불어나 있었다.


“나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했어. 위아래로 내복도 챙겨 입고 양말도 두 켤레 덧신었어.”


친구가 말했다. 나도 이어서


“나도. 털모자에 넥워머까지 단단히 준비했어. 이것 봐, 나도 오늘은 다른 사람들처럼 눈밖에 안 보이잖아.”


라고 응수했다.


“그거 알아? 어제가 1년 중 가장 추운 날이었대. 뉴스에서 그러더라. 어제 괜히 추운 게 아니었다니까.”


“정말? 소한? 대한? 그런 날인가? 그럼, 우리 그 추위를 뚫고 운동한 거야? 우리야말로 대단하다, 그치?”


내가 생각해도 우리는 참 긍정적이었다. 그날이 정확하게 1년 24절기 중 어떤 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대한이 소한의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을 생각하면 아마도 1월 초에서 중순 사이의 소한이지 않았을까 싶다. 대체 왜 사서 그런 고생을 했는지 여전히 이해 불가지만, 매서운 추위를 견뎌낸 경험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이때를 떠올리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지금도 친구를 만나면 빼놓지 않고 이 추억을 곱씹는데,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해도 질리지도 않는다. 뉴스에서 ‘오늘은 1년 중 가장 기온이 낮을 것으로 예상하며~”라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지어진다. 더욱이 드라마나 영화 속 예쁘고 화려한 모습은 지극히 ‘환상’이라고 일찍이 뼈저리게 깨달았다. 무엇보다 나는 화면 속 전지현이나 이효리가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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