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컵이면 다냐? 내 가슴이 어때서!
# 1
이십 대 초반, 낯선 여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스팸이 일상은 아니어서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도 곧잘 받곤 했다.
○○의 애인이라고 자신을 밝힌 그 여자는 사뭇 예의를 갖춘 톤으로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 씨와 ▲▲ 공연 보러 가기로 하셨나요?”
“네, 맞는데요.”
“그 공연 취소하시면 안 되나요? 원래 저와 보러 가기로 한 거여서요…… 아마도 저 몰래 약속을 잡은 거 같은데, 죄송하지만 그 공연에 안 가셨으면 해서요.”
“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뭐야, 여자친구가 있었던 거야?
음악 취향이 비슷해 같이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그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보다, 대체 이 여자는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남자친구 몰래 휴대폰을 뒤진 걸까? 우리의 관계를 의심하며 나에게 직접 확인하겠다고 대놓고 연락처를 얻어낸 걸까? 싶은 석연치 않은 불쾌감에 흠칫 싸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친구가 있는 줄 몰랐고(이것도 자기 애인과 바람피우는?? 여자의 핑계로 들렸을까?), 공연은 안 보면 그만이며,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 그와는 업무 외에는 사적으로 만나거나 연락한 적이 없고, 이번 공연은 첫 사적인 약속이었으며, 나는 빠질 테니 둘이 공연 잘 보고 오라는(응? 나 완전 대인배였잖아;;) 인사로 당황스러운 전화를 잘 마무리 지었다.
# 2
그 후로도 그 여자에게 몇 번 더 연락이 왔던 것 같다. 그를 만났느냐(답변은 늘, 원래도 그랬듯이 업무 때문에 회사에서 만나서 인사하고 회의하고 구내식당에서 시간 맞으면 때때로 점심 같이 먹는다 – 너무 솔직했나? 밥 얘기는 빼고 말할 걸 그랬나?), 그와 따로 약속을 잡은 건 아니냐, 그와 연락이 안 되는데 알고 있는 게 없느냐(이 여자야, 이걸 왜 나한테 물어. 애인인 너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 심지어 내가 지난 주말 또는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캐물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서 일종의 안부전화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대꾸했는데,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그 둘의 관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나를 계속 의심하고 압박하는 빈도와 강도도 점점 커져서 전화를 더는 받지 않기로 했다.
# 3
문제의 날. 자고 일어났더니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나를 한가득 비방하는 장문의 문자가 몇 통이나 와 있었다.
지금이었으면 ‘이거 미친 여자 아니야?’라고 바로 무시하거나, 자꾸 이러면 앞으로 문자와 통화 기록 다 모아서 법적 조치를 취한다고 협박하거나, 아예 이런 언급도 없이 경찰이나 법원에서 연락이 가도록 조치를 취했을 테지만, 그때는 어려서 꿈에도 생각지도 않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내가 왜 이런 욕을 듣고 있어야 하지? 내가 대체 뭘 이렇게까지 잘못했지? 이 여자는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지?’ 싶어서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물범벅이 되도록 질질 울고만 있었다.
어찌나 새가슴에 마음이 여렸던지 회사에서 직속 선배와 업무 회의를 하다가 그만 눈물이 또 터져버렸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좋은 어른’이었던 선배는 자초지종을 확인하고는 미친 여자의 애인인 그에게 나 대신 상황을 설명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 미친 여자가 나에게 연락하지 않도록 잘 조치를 해주었다(구체적으로 선배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와 더는 업무 때문이라도 얽히거나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해서 업무 조정을 해주었다. 그 미친 여자가 바란 대로 나 또한 회사에서 그와 가벼운 인사나 점심식사조차도 꺼리고 외면하게 되었다.
# 4
미친 여자의 망발은 금세 잊혔지만, ‘가슴도 작은 게’로 시작한 남의 남자에게 찝쩍거리는 파렴치한 X이라는 뉘앙스의 문자는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내 평생 가슴 작다고 비난받은 기억은 도저히 잊을 수 없다. 내 가슴은 또 언제 그렇게 자세히 봤대? 아! 회사 행사에 그가 동행인으로 데려온 적이 있었지. 그날 나는 일하느라 바빠서 행사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느라 말 한마디 주고받지 못했는데, 나를 계속 의식하고 있었던 거야? 내 가슴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 거야? 무섭기도 하면서 나도 잘 신경 쓰지 않는 내 가슴에, 그녀가 나보다도 더 관심을 기울였다고 생각하니 묘한 쾌감이 일기도 했다. 행사 내내 나를 관찰해서 그녀가 나보다 낫다고 찾은 점이 C컵은 돼 보이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 고작 이것 하나라니 그 미친 여자가 안쓰럽기도 했다.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한 가슴 크기로라도 나를 눌려보려고 했을 텐데, 미안하게도 나는 2차 성징이 막 시작되던 부끄러움이 많던 십 대 초반의 2~3년을 제외하고는 내 작고 예쁜 가슴에 아무런 불만(콤플렉스)이 없다. 지금은 하다 하다 타고난 가슴 크기로도 욕을 먹을 수도 있구나, 세상에는 기상천외한 사람들이 많구나 싶은 안줏거리 삼을 수 있는 의연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 5
그 후로 그와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회사 행사에서 멀리에서 잠깐 본 짙은 화장을 한 C컵의 그녀는 그보다 훨씬 연상으로 보였다. 짐작건대 아마도 그는 엄마처럼 자신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 만한, 포근하고 의존하고 자신을 잘 돌봐 줄 만한 여성으로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을까 싶다. 신체는 성인이지만 무한히 사랑받고 의존하고 싶은 유아기적 욕구에 여전히 정신이 머물러 있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녀 또한 상대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불가능한) 것이 사랑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듯하고. 두 사람은…… 불가능한 사랑(?)에 도전하는 유유상종(類類相從),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사랑이라고 믿는 현실을 왜곡한 의존과 구속, 집착을 반복하며, 서로 파멸돼 가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지치고 무력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 사납게 화장을 했지만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해 보이던 그녀, 둘의 잔상만이 어렴풋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