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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ug 23. 2024

나는 섹스를 좋아하는가?

섹스에 대하여 ① - 섹스는 마음(심리)의 반영

사랑하는 관계만큼 ‘몸(신체)는 마음(심리)의 반영’이라는 말이 뚜렷이 드러날 수 있을까. 사실 가장 명백한 이별(이혼) 징후는 장기간 섹스의 부재이다. 머리로는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해’라고 익숙한 대로,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만, 솔직한 몸의 반응은 숨기고 싶어도 감출 수 없다. 사랑의 ‘유지’에 있어서는 몸이 마음보다 언제나 정직하다.


상대와 더는 섹스를 하고 싶지 않고, 상대와의 섹스가 부담스럽고 심지어 안정적이며 배타적인 섹스 파트너인 상대가 (정당하게) 섹스를 요구할까 봐 걱정되고 두렵다면, 또는 왠지 모르게 상대에게 섹스를 요구하기 껄끄럽고, 언젠가부터 거절받는 것이 두려워 (정당한?) 섹스 요구를 하기 망설여진다면 결혼을 했든, 장기 연애를 하고 있든 이 관계는 실질적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오늘은 피곤하다’, ‘요새 몸이 좋지 않다’, ‘요즘 신경 쓸 일이 많다’, ‘(앞선 이유들로) 섹스에 집중하기 어려울 것 같다. 미안하다’ 같은 대화가 반복된다면 두 사람의 관계에 적신호가 켜졌을 확률이 매우 높다.


한창 서로에게 빠져들어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갈망하던 시기에 과연 피로했던가. 안정적 연애 관계를 서로를 향한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와 비교하기는 무리수이지만,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고 지치고 뭔가 답답하고 어긋나고 있다는 감정이 든다면, 언젠가부터 서로 간의 갈등이나 언쟁이 두려워 자기감정이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두 사람의 관계의 상태를 (두렵더라도) 직면해 진지하게 점검해야 한다.




성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감정이 앞섰을 때는 사랑하는 상대와의 섹스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 같다. 은근한 긴장감과 은밀함, 묘한 흥분감과 두근거림, 어떤 상황과 감정이 펼쳐질지 모를 짜릿함과 기대감, 세상에서 오로지 둘만이 공유하고 채워줄 수 있는 즐거움과 쾌감, 잠깐이지만 온전히 하나가 된 충만감과 만족감, 우정에서는 느낄 수 없는 육체적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밀도 높은 친밀감과 밀착된 기분, 사랑받고 조종당하는 기분, 사랑하고 지배하는 기분, 야한 밀어와 야한 상황, 도덕적 관념과 사회적 시선을 밀어낸 가식 없는 벌거벗음 - 초자아와 자아를 벗어난 본능적인 원초아에 충실하도록 허락된 이 시간은 물론, 지금도 좋아한다.


이런저런 기술(?)과 체위, 섹스에서 오는 여러 감정들을 경험하며 낯설기만 하던 섹스에도 일종의 자아가 생기게 되었다. 좋고 싫음, 선호하는 것과 기피하는 것 등의 취향과 주관이 생긴 것이다. 섹스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만큼 섹스를 보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우선, 나는 위생과 피임에 철저하다. 씻지 않고 하는 섹스, 콘돔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는 섹스는 하지 않는다. 내 기준에서 섹스에서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이 두 가지가 충족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서 내 몸이 삽입할 준비가 되지 않는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도 같다.


마음이 울적해서 위로받고 싶거나 내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서 하는 섹스는 (안정적인 파트너와도) 해본 적이 없다. 극단적으로는 원나잇 같은 오로지 육체적 쾌감을 얻기 위한 섹스가 해당할 것 같은데, 자괴감이나 공허감이 클 것 같기 때문이다. 원초적 본능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인간인 내가 동물과 무엇이 다를까 싶은 수치심, 희열과 쾌감으로의 도피 뒤에 변하지 않은 우울한 현실을 다시 맞닥뜨렸을 때 느낄 더욱 큰 간극에 따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원나잇의 경우, 만일 섹스가 만족스러웠다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없고 안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결핍된 대상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섹스 이후 오히려 커져서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 자명하고, 만일 기대와 달리 섹스마저 불만족스러웠다면 허탈감과 공허감에 인간쓰레기가 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매우 부정적이다. 어떻게 보면 쾌락을 초과한 (예상되는) 고통의 회피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섹스를 원한다는 의미는 마음이 즐겁고 건강하고 여유로운 상태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파트너가 있을 때) 횟수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면 만족하고, 섹스의 빈도(양)보다는 질 즉, 얼마나 서로 집중해서 만족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창 사랑의 열정에 불타올라서 말 그대로 사랑의 힘으로 불가능이 가능해질 때,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휴가 같은 때는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레 매일 할 수도 있지만, 평소에는 체력도 약하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땀 흘리기를 좋아하지도 않아서(구체적으로는 평소에도 필라테스, 등산 등의 운동을 하고 샤워하기까지는 좋은데 잘 안 마르는 축축한 머리 말리기를 귀찮아한다), 섹스를 좋아하지만(긍정적인 경험을 많이 했지만)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 생리 직전이나 직후에 이때는 꼭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성욕이 강해지고, 은은한 향이 번지는 향초를 켜고 하는 섹스를 좋아한다. 이는 삽입 섹스 기준이고 평소에도 가벼운 스킨십과 애무로 친밀감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대화로 정서적 교감을 하는 것은 매우 좋아한다.


마르고 가슴도 작은 편이지만 내 몸이 아름답고 균형 잡힌 예쁜 몸이라고 생각해서 벗은 몸에 대한 부끄러움은 별로 없는 편이다.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다면 노브라로 다니고 싶은 욕구도 있는데, 사람들의 노브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잘 알고 있기에 실행해 본 적은 없다. 상대에게 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여성 상위, 아침이나 낮에 하는 섹스 등에도 거부감은 없는데(좋아하는데), 처음 삽입과 마무리인 사정은 서로 몸을 밀착시키고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안정적인 정상위로 하는 것을 선호한다. 서로 입 안에 상처가 있거나 성기를 씻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면 삽입 섹스와는 다른 자극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오랄 섹스, 때로는 상대에게 시각적인 흥분과 색다른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 (평소에 절대 시도하지 않는) 야한 속옷 등을 입기도 좋아한다. 그러나 상처가 나거나 감염 위험이 큰 항문 성교는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으며, 섹스 중에 욕을 하거나 엉덩이를 때리는 등의 행위는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고 가피학증(Sadomasochism, SM)이 연상돼 섹스 의욕이 급감해 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섹스를 사랑하는 사이에서 애정을 주고받는 자연스러운 행위이자, 오로지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교미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섹스는 쾌감을 즐기는 유희 활동이자 건강의 징표로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피임 기술이 발달했더라도 섹스에 따른 임신과 출산은 고스란히 여성의 몫이기에 남성보다 여성이 성관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여성인 내가 상대와의 성관계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만큼 상대를 향한 내 감정과 믿음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순간도 없는 듯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결혼을 약속하거나 아이 양육을 합의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시점에) 믿을 수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내 의사가 존중받고 대화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마음과 몸의 문이 활짝 열리고,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떤 사건과 계기로 상대방은 더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며, 해소되지 않고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갈등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이때는 상대와의 사이에서 (만에 하나) 아이가 생기면 내 인생도 끝장이란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고, 의식하진 않았지만 이러한 무의식의 작용으로 상대와 섹스하고 싶은 마음을 철회했다고 알게 되었다. 심지어 상대와의 섹스는 이제껏 늘 만족스럽고 그와의 섹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충만함, 온전함, 배려받고 사랑받는 느낌을 좋아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섹스하고 싶은 욕구를 봉인해 버렸다.


연애 시절, 그날따라 분위기는 무르익었는데 콘돔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의 평소 바람이기도 해 어찌어찌하다가 콘돔 없이 하는 삽입에 동의한 적이 있다. 상대는 꽤나 만족스럽고 흡족한 눈치였고 나도 좀 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삽입 섹스였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문제는 그 후였다. 피곤하고 나른함, 가슴 붓기, 가벼운 감기 증상 또는 오한, 아랫배 통증, 빈뇨 등 평소에도 겪는 생리전증후군과 임신 초기 증상을 분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생리주기도 짧게는 28일에는 길게는 40일까지 매달 변화가 큰 편이어서 생리 예정일에 접어들자 하루하루 초조, 불안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섹스의 쾌감은 잠깐이지만 임신과 출산은 현실이고, 여성인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 온몸으로 강력하게 와닿은 순간이었다. 수정란이 착상되지 않아 두꺼워진 자궁 내막이 마침내 몸 밖으로 배출되었을 때, 얼마나 안도하고 쿵쾅대던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려 진정시켰는지 모른다. 약 열흘 남짓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애인과 사이가 좋았는데도, 그 후로 한두 달은 섹스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콘돔 착용을 거부하는 사람과는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날이 예외였고 평소 그는 콘돔을 잘 구비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혼자 불안해하기보다 바로 산부인과에 가서 상담하고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사후피임약 처방받아서 복용하고, 상대에게도 나의 이런 불안감을 구체적이고 있는 그대로 공유할 것이다. 이 때만 해도 찜찜해도 어쨌든 나도 동의했으니 행동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불안감은 오로지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불안감에 대처하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은 상대의 적나라한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했고, 우리 선조들이 살던 시대에 비하면 임신과 출산이 안전한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은 심적으로는 옛날 사람들처럼 목숨과 인생을 건 의지이자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피임 기술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그럼에도 생명은 신비롭고 그 누구도 완벽한 피임을 장담할 수는 없다. 여성에게도 섹스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유희이고 쾌락이지만 무의식에는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를 생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다짐이기도 하다. 육체적 쾌락에 치중해 피상적인 관계만을 맺는 사람이 아닌 이상, 여성에게 안정적인 관계의 연인과의 성관계는 곧 완전한 신뢰이다. 임신과 출산의 불안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상대를 오롯이 신뢰했을 때 안정적인 섹스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누군가와 섹스를 할지 말지 결정(선택)할 때 엄격하고 신중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는데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파트너의 자원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런 사람은 극히 소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는 세 개의 글로 구성했습니다.


1. 나는 섹스를 좋아하는가? : 섹스는 마음(심리)의 반영 - 현재 글

2. 왜 우리나라는 섹스에 보수적일까 : 보수적 접근이 현명한 이유 - 발행 완료

3. 언제 첫 섹스를 해야 할까요? : 여성들을 향한 섹스 잔소리 - 발행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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