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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ug 05. 2024

더 많이 사랑하면 진짜로 을일까

최선을 다한 사랑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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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을이 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얼핏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 사람은 관계에서 진정한 갑이다. 더 많이 사랑한 만큼 이별의 상처가 크고 깊을 수 있지만, 진심을 다해 사랑한 만큼 미련과 후회 없이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매듭지을 수 있다. 자기가 보낸 사랑의 마음을 자기가 거둘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주체적이고 자유롭다. 반면, 상처가 두려워 매사 계산하는 사랑은 영리한 갑처럼 보이지만 완전한 을이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 매 순간 변하는 상대의 감정과 마음, 생각을 눈치 보고 휘둘리기 때문이다. 정성과 마음을 쏟지 않은 만큼 이별의 후유증은 미미하겠지만, 마치 비즈니스처럼 이익과 손해에 경도된 이해타산적 사랑은 늘 공허하고 불안하며 찜찜하다. 시작한 것도 끝맺을 것도 없으므로 늘 제자리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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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자신에게로 떠나는 여정이다

_대니 케이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_헤르만 헤세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_파울로 코엘료


사랑과 여행은 닮아 있다. 각 명언의 여행을 사랑으로 바꿔 읽어도 일맥상통한다.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이별 뒤에 얻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 수도,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 이해일 수도, 참된 자유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 상대의 비겁함, 비열함, 이기심, 미성숙함, 저열하고 구질구질한 이별 과정과는 상관없다. 오로지 이번 연애에서 나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보고 느꼈는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랑은 결심이고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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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항상 전화받고 소통하는 사람이 바로 너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야. 둘이 아주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랄게.”
_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데이비드 프랭클, 2006)> 중에서
 
You know, in case you were wondering - the person whose calls you always take? That's the relationship you're in. Hope you two are very happy together.
_by <The Devil Wears Prada(David Frankel, 2006)>


시도 때도 없는 직장 상사 미란다의 연락과 호출에 속수무책인 앤드리아에게 연인 네이트가 건넨 이별의 말이다. 저널리스트를 희망한 앤드리아는 처음에는 패션 매거진 <런웨이>의 비서직을 우습게 여긴다. 그러나 점차 미란다와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자기의 잠재적 재능을 발견하며 <런웨이>에 몰입과 열정 이상으로 집착한다. 특히, 미란다의 무리한 업무 지시에도 쩔쩔매며 애인과 친구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회사 사람들 이외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진다. 앤드리아의 욕망의 방향과 소중한 가치가 변한 것이다.


아프고 씁쓸한 연인 간의 이별은 누군가의 욕망과 가치관이 극적으로 변했다는 징후이다. 더는 두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일치하지 않고, 서로의 핵심 욕망과 가치관을 수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때 극적인 변화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새로운 도전, 성장과 성숙처럼 좋은 방향일 수도, (여건상) 억압했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위한 집착과 회피, 중독처럼 지금보다 성장에 저하가 되는 방향일 수도 있다. 누가 먼저 이별을 통보했는지에 상관없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별(특히, 이혼)의 거부는 변화의 거부이며 현실의 회피이고 성장의 정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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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실수로 뒤바뀐 인생을 산 두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반짝반짝 빛나는(MBC, 2011)>이라는 주말 드라마를 재밌게 봤다. 예전 드라마지만 황금란이라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각이 시간이 지나면서 확연히 달려져서 기억하고 있다. 금란이는 엄마가 식당을 운영하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사회생활을 한다. 언니와 동생에게 항상 양보하고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착하고 속 깊은 좋은 딸로 살아간다. 금란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는 가난한 고시생인 남자친구 승재가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결혼할 것을 꿈꾸고 있고, 금란을 사랑하는 승재도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그는 막상 사법고시에 합격하자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의 딸들과 선을 보러 다니고, 급기야 일편단심인 금란에게 매몰차게 이별을 통보한다.


예전에는 승재를 배은망덕한 나쁜 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은 서는 곳이 바뀌면 욕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상황과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인지하지 못하고 억압했던 (속물적인) 결핍이나 욕구를 뒤늦게 깨닫고 발현하기도 한다. 도약하거나 변하려는 사람과 멈춰서  의존하려는 사람은 같이 어울리기 쉽지 않다. 연인 간에도 재능과 능력, 성품 등에 대한 은근한 질투와 경쟁으로 함께 성장해야지,  사람 가운데  명만 꾸준히 성장한다면 언젠가는 이별할 확률이 높다. 다른 한 명이 뒤처졌다는 열등감과 자격지심, 패배주의 등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한때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고 소중했던 연인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무능하고 열등한 사람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승재가 약속대로 금란과 결혼했어도 결국은 이별했거나, 안 헤어졌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착한 금란의 사랑도 순수하지만은 않다. 금란은 승재를 뒷바라지한 대가로 검사나 판사, 변호사의 아내라는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금란에게 승재 뒷바라지는 일종의 위험성이 높은 투자이고, 거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에 말했듯 이해타산적 사랑은 공허하고 불안하며 뭔가 꺼림칙하다. (그렇다고 금란이 승재를 사랑하지 않고 이용하려고만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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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우선은 장점이나 잠재력 같은 긍정적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사랑하는 이의 말과 행동의 맥락을 좀 더 이해하면 타인의 시선에서 이상해 보이거나 오해할 만한 모습도 수용한다. 더 깊이 사랑하게 되면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 같은 부족한 면모조차 사랑하는 이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따뜻하게 감싸게 된다. (치명적인 허물이나 잘못을 무조건 덮고 감싸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내 경우, 사랑하는 이를 오롯이 믿어서 있는 힘껏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받거나 배신당할 수 있다고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믿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므로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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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최선을 다한 사랑은 아프다. 진심을 다하고 충실할수록 고통은 크고 상처는 깊다. 이별의 상처를 훌훌 털고 빨리 씩씩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괜찮은 척' 살아가고 싶어 하고, 이것이 어른스럽고 멋지다고, 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굳건히 믿고 지지했지만 배신한 사람을 두고두고 원망하거나 바보 같았던 나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 세월만큼 나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상실한 지난날을 충분히 아파하고 애도하는 그것이 최선을 다해 사랑한 나날과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 내용을 영상 설명으로도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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