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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운 식탁 Nov 15. 2019

가출

가출 

♧. 가출 



훌륭한 며느리와 아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타일렀다. 그래도 위로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꿈을 꾸던 절친한 동기 여섯 명은 항상 모여 다녔다. 동기들은 서로를 각다귀라 부르며 자매 이상의 우정을 나눴다.      

 그녀가 다녔던 상업고등학교에는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생활이 궁핍해도 자식들을 상급학교에 보내는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부모의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은 가난했다. 그들은 가난했기에 큰 꿈을 꾸었다. 

좋은 대학에 가서 판검사가 되는 꿈,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는 꿈, 사업가가 되어 돈을 많이 버는 꿈. 대단한 꿈을 꾸며 그들은 가난을 이겨냈다.      


 그들 모두는 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순정은 꿈이 허황함을 빨리 알아차려, 취업을 결심했다. 


그녀가 취업을 하고, 누구, 누구는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불현듯 순정은 친구들이 만나고 싶었다. 뜸하게 연락을 하던 친구를 거치고, 또 다른 친구를 거쳐,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각자 꿈을 찾아 떠난 후, 30년 만에 여섯 명 중, 네 명이 모이게 되었다.      

 

그동안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야무지게 꿈을 키워갔는지, 누구는 변호사로, 누구는 성형외과 의사로, 또 누구는 건축회사 사장으로, 전도유망한 사업가로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있었다.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순정은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그들은 미국 센트럴파크의 풍경과 모 대학의 커리큘럼과 법적 구속력에 대해서 논했고, 기천 만 원 하는 사회 저명인사의 성형과 명품 자랑에 열을 올렸다.      

 그들 앞에서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다. 그들과 우정을 나누며 희희낙락했던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순정은 이방인이 되어있었다.    

  

 29년을 주부로 살아온 세상에서는 남편의 와이셔츠를 어떻게 다리면 잘 다려지는지, 비 오는 날 저녁엔 어떤 음식이 어울리는지, 고부갈등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지, 그녀에게는 최고의 삶의 노하우지만, 친구들에게는 사소하고 불필요한 삶의 철학적 가치도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사는 세상과 순정이 살아가는 세상은 같은 세상이 아니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왔다.           

비 오는 거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내 나이 벌써 쉰이 넘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무얼 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벌써’라는 단어 하나는 초라함, 비루함, 덧없음을 대변했다.   

   

 그들이, 젊은 날이, 몹시도 그리웠다. 못 견디게 그리운 그들에게 순정은 달려갔다. 

울컥울컥 솟구치는 울음을 달고. 그러나 계단 몇 개를 남겨두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자신은 훌륭한 며느리와 아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타일렀다. 그래도 위로되지 않았다.     


 젊은 날, 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며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던 친구들의 성공. 그 성공이 정신적 지주를 무너뜨린 치명적인 무기였다.      

 친구들의 성공이 부러운 건 아니었다. 안일하게 자신을 방치한 죄, 스스로 올가미를 쓰고 좁은 새장에 자신을 가두어 둔 죄가 가슴 쓰리게 그녀를 닦달했다.      


 그녀는 오가는 사람들이 빼곡한 거리에 풀썩 주저앉아 울었다. 자신의 삶이 초라하고 무의미해서 울었다.   

   

 젊은 날이 못 견디게 그리워도 직장을 잃은 남편이, 취준생인 아들이, 대학생인 딸이, 늙고 병든 부모님들이, 그녀의 도움을 기다린다고,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친구들한테 차마 고백하지 못한 현실을 흐느끼며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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