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한때
♧. 영광스러운 한때
1973년, 석유파동의 여파로 미래 에너지 절약 산업인 반도체와 컴퓨터 산업 육성이 시급했다. 이에 전자공업 기술력이 국가발전의 경쟁력이라는 모토 아래, 그가 다니던 공업고등학교가 구미 최초로 공업 특성화 학교로 지정되었다.
1976년에는 전자공업고등학교로 전환되었으며 1977년, 국립학교가 되었다. 그 덕분에 그는 전자공업고등학교 1기생이 되었으며 졸업을 한 학기 앞둔, 1977년 8월, 기술직 사원으로 GS 사에 입사했다.
GS 사는 현 L 기업의 모태이며 1975년, TV 생산 구미공장으로 준공된 회사였다.
그 당시, 구미는 기술직이 턱없이 부족했다. 정부는 기술직 인력을 확보하려고, 구미와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에게 병역특례 혜택을 주었다. 그도 입대 대신 GS 사에 병역특례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한도 공업으로 파견을 나갔다.
전화기를 생산하던 한도 공업을 GS사가 인수하게 되면서 한도 공업의 전자기술을 인계받는 업무를 그가 하게 된 것이다.
직장은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곳이었다. 능력을 인정해 주는 회사에서 발판을 만들어,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인재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 되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난이 숙명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회사는 가난을 벗어나게 해 줄, 동아줄 같은 곳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간부가 되는 꿈, 하이칼라 대열에 합류 꿈, 그 꿈을 회사에서 이루고 싶었다.
그는 해냈다. 기술직 말단사원으로 시작해서 교육부 부장이라는 자리를 얻기까지,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지만,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 꿈을 이룬 셈이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노력파인 그의 능력은 대학 출신보다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 타이틀이 곧, 능력이었고 학력은 그의 핸디캡이었다.
학력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실감하고 주경야독으로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공부했고, 야간대학에 입학해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 같은 노력을 통해 회사가 L그룹으로 성장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했다.
그런 그를 능력이 소진될 때까지 사용할 거라고 확신해 왔지만, 회사는 그를 밀어냈다.
좋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눈을 지그시 감고 영광스러운 한때를 회상했다. 그가 낸 아이디어로 상대 경쟁사를 누르고 파격적인 판매량을 올렸을 때, 사장단 주주들이 그에게 내린 찬사는 실로 대단했다.
출근길 위풍당당하게 회사로 들어서면 모두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봤고, 부하 직원들은 그를 롤모델로 삼았다.
“이거 왜 이래! 나도 한때는 부하 직원을 호령하는 존재였다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마지막 남은 열정을 몽땅 불태울 텐데, 인재를 몰라보고 말이야. 뭐 어쩌고 어째?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다고? 이장도 해본 놈이 잘한다고 했어! 경력을 무시해? 개떡 같은 놈들. ”
욕을 한바탕 퍼부으며 인적이 끊긴 거리를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