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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 Oct 26. 2019

낯선 동네 미용실, 6000원짜리 커트

여자 친구를 한국사 시험장으로 바래다 주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부천의 한 고등학교로 향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오래된 슬로건을 자연히 떠올리는, 교문에서 학교 건물까지의 엄청난 경사는 또한 누군가의 응시를 위해 몰려든 차들로 가득했다. 불과 백 몇십 미터의 거리를 가는 동안 서다 가다를 반복하다 보니 겨우 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주차를 하고 있자니 나만큼이나 주차 자리를 바라 왔을 차들이 계속 들어왔다. 그 차들이 도대체 네놈의 주차는 언제 끝나냐는 질문을 하는 듯 성급하게 머리를 들이밀어대는 통에 시험을 치기 전의 예민한 사람을 미처 배려하지 못한 육두문자를 내뱉어 댔지만 무사히 주차를 했다.


시험 시간은 80분.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어느새 덥수룩해진 머리를 깎으면 딱이겠다 싶어 처음 보는 동네를 돌아다녔다. 돌아다녔다는 말에 애처로운 표정으로 낯선 동네를 한참동안 헤매는 모험기를 기대했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그 표현이 무색할 만큼 짧은 시간에 미용실 간판과 영업을 알리는 회전등을 발견했지롱.


3분간의 방황을 멈추게 해준 미용실 간판


가볍지 않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렇게 이른 시간의 손님을 기대하지 않은 듯 사뭇 동그래진 눈의 헤어 디자이너님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커트되나요?”


“네.”


짧은 대화 이후 사각대는 가위 소리, 바리깡이 빗을 스치는 기분 좋은 진동을 즐기다 보니 이내 이발은 끝났다.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가게와 못지않게 오랜 경력을 지녔을 법한 헤어 디자이너의 모습과는 달리 옆머리에 묘하게 불규칙적인 그라데이션이 남긴 했지만, 만족스러웠다. 억센 것인지 시원한 것인지 살짝 헷갈리는 샴푸를 받는 느낌도 싫지 않았고.




머리를 말린 후 거울을 빌려 왁스를 바르고 있자니 저건 뭐하는 행동인가 하는 눈빛을 잠시 보냈던 헤어 디자이너님이 정적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말을 건넸다.


“백만 불짜리 머리에요.”


‘... 그렇군요. 하지만 아직 아무도 백만 불을 제시하지는 않았답니다. 뭐, 백만 불 정도면 평생 비니를 쓰더라도 두피째 드릴 수 있어요.’라는 끔찍한 농담은 맘 속에 담아두고 감사 인사와 함께 왁스 바르기를 끝낸 후 계산을 위해 카드를 내밀었다.


“아, 카드는 안 되는데요.”


지갑 속의 현금이라곤 만 이천 원 밖에 없던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요즘 세상과 약간 동떨어진, 제발 만 이천 원은 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세상에 역시 쉬운 건 없다는 탄식, ATM을 찾아 미용실을 찾을 때도 필요가 없었던 모험을 떠나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함께 품으며 물었다.


“제가 현금은 얼마 없는데... 얼마죠?”


“육천 원이요.”


이때쯤 되니 아무래도 내가 타임 슬립을 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 마니아인 내가 드디어 못해왔던 일들을 이뤄가며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더 실없는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여전히 지갑 속 지폐는 신권이었고 거슬러 받은 사천 원 역시 그랬다. 아직도 육천 원을 받는 미용실이 존재했던 것이다.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처음 보는 동네 이발소나 미용실을 불쑥 들어가는 건 언제나 의외의 즐거움을 준다. 사실 가격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낯선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나누는 한담과 끝나고 난 후 조금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결과물에 대한 불안 섞인 기대를 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잘 나오면 횡재인 것이고 좀 망한다고 해도 머리는 자라기 마련이지 않은가. 한 달쯤 불편하더라도 아침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아주 못 봐줄 정도는 벗어날 수 있으니 조금 과장하자면 나 같이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불안에 대한 면역을 키우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머리에 좀 더 신경을 쓰는 이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은 금액을 받는 바버샵과 그 곳을 이용하는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내가 더 선호하는 방식이 있는 것일 뿐.


미용실을 나서니 고작 열 시였다. 시험 시작이 열 시인데 너무 빨리 끝났다 싶었지만 이내 편의점에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캔을 땄다. 머리에 묘한 그라데이션을 남긴 채 아침 열시에 맥주를 마시는 게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근데, 아침엔 추웠던 날도 볕이 들며 슬슬 따뜻해지는데 그러면 안 되나? 몰라 술이나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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