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전쟁터의 보고
※본 글에는 <오징어 게임 2>의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뒤늦게 <오징어 게임 2> 시리즈를 봤다. 인간의 잔혹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스토리와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동화 같은 배경에 빨려 들어 하루 만에 <오징어 게임 1>을 정주행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오징어 게임 2>는 내게 큰 여운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2>를 보면서 이전에 떠오르지 않았던 생각이 내내 들었다. <오징어 게임> 이 '우리 마음속 전쟁터'와 닮았다는 생각이었다.
해로운 감정은 해로운 선택을 이끈다.
극 중에서 게임 참가자들은 모두 빚을 지고 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빚의 금액만큼, 참가자들은 스스로 감당하기 마음의 상처가 좌절감을 안고 게임에 참가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성'과 '감성'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혈액형처럼 자리 잡고 있는 MBTI에서 T(이성적인 사람)/F(감성적인 사람)를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글을 쓸 예정이지만, 이성과 감성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이미 수많은 인지과학, 심리학 실험에서 증명된 것처럼 우리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판단의 상당 부분은 실은 감정에 의한 것이다. 심지어 어떤 뇌 과학자는 우리는 감정에 의해 판단을 하고 이성은 이를 합리화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다.
임상 현장에서, 심한 우울감을 호소하시는 환자분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신다. 이를 우울감에 의한 인지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 부른다.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우울증 환자분들은 이러한 인지왜곡으로 인해 옳지 못한 선택을 하시고 이는 다시 나의 우울감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해 음주를 하거나 자해를 하고, 이후 망가져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다시 후회하고 자책을 한다.
게임 참가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게임에 참여한다. 살아남을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서 상금을 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O버튼을 누른다. 시청자인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껏 결과는 456명 중 1명만 상금을 탔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참가자들이 계속 이런 무모한 결정을 하는 이유는, 그들은 이미 내면의 아픔으로 생겨버린 인지왜곡이란 깊은 구렁 터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중독은 결국 나를 파괴시킨다.
<오징어 게임> 은 또한 중독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 개인에게 '중독'에 빠지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은 '즉각적인 보상'이다. 술을 마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나른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천장에 달려 있는 투명한 돼지 모형통 위로 오만 원권 짜리 지폐들이 쏟아진다. 전광판에는 누적 금액을 나타내는 숫자들이 정신없이 올라간다. 참가자들이 그토록 원했던 '돈'이라는 보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중독은 대부분 다른 중독을 부른다. 몇몇 참가자들은 게임에 참여하기 전 이미 중독자였다. 탑(타노스)은 마약에, 양동근(박용식)은 도박에, 그리고 임시완(명기)은 코인에 중독이 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두 즉각적인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정신의학에서 '중독'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는 '일상생활의 손상'이다. 극 중에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마약, 도박, 코인만 생각하며 종일 지냈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임시완이 코인에 온 정신이 팔려 정작 신경 써야 한 여자친구는 등한시했던 것처럼, 많은 중독자들은 일상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잊은 채, 중독 물질에만 몰두해 있다.
게임 참가자들도 더 이상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고, 미래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게임에서 살아남아서 상금을 타는 일에만 종일 몰두해 있다. 시간이 갈수록 부실한 식사에 대해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어는 순간 게임 참가자들은 '돈'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중독은 반드시 나를 파괴시키게 된다. 많은 참가자들이 게임 중 목숨을 잃게 된다. 탑 또한 과격한 싸움으로 비참하게 죽어갔다. 실제로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 분들이 이미 만성으로 간경화가 진행되어 식사를 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소주 한잔만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다. 중독은 참 끔찍한 병이다.
'죽음'이외에도 중독자들은 나와의 소중한 관계를 잃으면서 나를 서서히 파괴시켜 간다. 양동근은 무한히 자신을 신뢰하던 엄마와의 관계를 잃었고, 임시완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를 끊었다. 어떤 분이 음주 후 주사로 인해 이미 많은 관계들을 잃었다면 그분은 임상적으로 알코올 중독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이처럼 참가자들은 사실 게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에 나도 모르게 '중독'된 것이다.
'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강하다.
이정재는 죽음의 위협이 앞에서도 당당히 게임에 참여한다. 숱한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사람들에게 '나를 위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설득한다. 극 중 후반부에는 총을 들고 게임 밖으로 나가서 시스템 자체를 파괴시키려는 저항 한다.
저항은 매섭다. 이정재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예상보다 강하다. 게임 앞에서 수동적으로 살던 '참가자'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당당히 운명에 맞서고자 '저항군'으로 변모한 그들의 눈빛에는 생기가 넘쳐 보였다.
어떠한 힘이 이들을 변화시킨 걸까. 너무나도 달콤한 돈의 유혹을 뿌리치고 거대한 폭력에 맞서게 한 걸까. 단순히 게임에서 죽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은 목숨을 걸고 총을 쉼 없이 쏘는 전문 전투병인 병정들과 싸운다.
난 그들의 이러한 용기는 '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이정재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돈을 차지했다는 트라우마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트랜스 젠더인 박성훈(조현주)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여성성을, 강하늘(강대호)은 항상 갈망하던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쾌락을 위해 나를 해하는 선택을 하려는 이들의 마음 한켠에서, 작지만 분명한 소리가 들린다.
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