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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시연 Oct 27. 2024

봄을 맞이한 과수원 풍경

멀리 보이는 산기슭은 온통 하얗다. 


흰 눈이 숲에 내려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사과꽃이 만개한 소화네 과수원 풍경이다. 사과 꽃봉오리는 처음엔 진분홍색이었다가 꽃잎이 벌어짐에 따라서 색이 점점 연해졌다가 만개할 때는 거의 흰색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한가운데 있는 소화네 빨간 기와지붕이 유독 눈에 더 띄었다. 소화는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볼수록 정감이 가는 사과꽃. 꽃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탐스럽게 열리는 사과들을 보면서 소화는 사과꽃을 ‘백설공주 꽃’이라고 불렀다.      


사과꽃이 피는 봄이 되면 소화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상큼한 사과꽃 향기를 맡으려고 코를 벌렁거리면서 과수원 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랬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앗!”


소화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사과꽃에 코를 가져다 대면서 깊게 숨을 들이쉬는 순간 꽃 속에 있던 꿀벌이 콧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소화가 놀라서 콧바람을 세게 불자 꿀벌도 놀랐는지 다른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당황한 중에도 꿀벌은 소화의 콧속에 따끔하게 벌침을 놓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앗! 따가워.”


소화는 콧속이 너무나 따갑고 아픈 나머지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그동안 벌에게 쏘였어도 운 적은 없었는데 이번만은 예외였다. 소화가 울면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엄마가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다 큰 게 왜 울면서 들어오는 거야?”

“벌에게 쏘였어요.”

“어디를?”

“콧구멍요.”

“쯧쯧쯧! 어떻게 해야 코도 아니고 콧구멍을 쏘일 수가 있는 거야? 작년에는 이마에 벌을 쏘여서 그렇게 고생하더니 이번에는 콧구멍이야.”

“꽃 속에 있는 벌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어요.”

“안 봐도 훤하다. 이번에도 사과꽃에 코를 벌렁거리면서 가져다 댔겠지. 눈으로만 봐도 충분한데 구태여 사과꽃 향기를 맡는다고 그 야단을 떠는지 모르겠다. 선머슴애처럼 뛰어다닐 것이 아니라 오빠처럼 진듯하게 있으면 좀 좋아.”


엄마는 마뜩잖은 표정을 하면서 안방에 들어가 핀셋과 연고를 가지고 나왔다.


“어느 쪽 콧구멍이야?”

“오른쪽요.”

“고개 쳐들고 콧구멍을 최대한 넓혀봐. 그래야 벌침을 빼내지.”


엄마는 핀셋으로 콧구멍을 이리저리 휘젓더니 마침내 벌침을 빼내었다. 벌침은 아주 작고 까맸다. 그리고 그곳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따끔거리고 아픈 것은 차츰 가라앉았다. 문제는 혹부리영감의 혹처럼 오른쪽 콧구멍이 너무 부풀어 올라서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소화는 답답한 나머지 입으로 ‘헉헉’ 거리며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쌍둥이 오빠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하하하. 혹부리영감의 혹이 네 얼굴에 붙은 거야. 아예 한쪽 콧구멍이 실종되어서 보이지 않잖아. 지금까지 본 네 얼굴 중 가장 걸작이다. 정말 못 봐주겠다.”

“그럼 보지 마라. 누가 보라고 했냐?”

“그래도 천만다행인 줄 알아.”

“뭐가 다행인데?”

“양쪽 콧구멍을 다 쏘였다면 숨이 막혀서 죽을 수도 있었잖아.”

“이마에 벌을 쏘였을 때도 그렇게 놀리더니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 실컷 놀려라. 내가 봐도 웃기거든.”


소화는 쌍둥이 오빠가 계속 놀려대도 투명 인간 취급하면서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쌍둥이 오빠가 하는 말에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이면 그것을 빌미로 점점 더 심하게 놀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음날에 일어났다. 세수하고 거울을 본 소화는 비명을 질렀다. 


“앗! 내 얼굴이 헐크가 되었어.”


소화는 비명을 지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울 속에는 콧구멍과 눈이 너무 퉁퉁 부은 나머지 괴물이 된 헐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소화는 너무나 좌절한 나머지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안 했다. 몇 번이나 아침밥을 먹으라고 해도 기척이 없자 엄마가 소화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안 일어나? 밥 먹으라고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도 안 하더니 아직도 이불속에 있네. ”

“아침밥 안 먹을 거예요.”

“웬일이야! 밥을 안 먹는다고 할 때도 있네. 그런데 왜 아침밥을 안 먹는다는 거야?”

“오늘은 학교에 안 갈 거니깐요. 아니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뜬금없이 학교를 안 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뭔데?”

“내 얼굴을 보세요.”


소화는 이불을 걷어서 제치고 엄마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생각보다 많이 부었네. 그렇다고 학교를 안 가면 안 되지. 잠깐 기다려 봐.”


엄마가 얼른 화장대 서랍 안에서 마스크를 꺼내 왔다. 마스크는 흰색 천으로 만든 것으로 엄마와 아빠가 과수원 일을 할 때 쓰는 것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어른용 마스크를 쓰니 소화의 눈만 빼꼼히 겨우 보였다. 소화가 움직일 때마다 마스크는 소화의 커다란 눈을 가리려고 용을 썼다. 그래서 소화는 자주 마스크를 잡아서 턱으로 내려야만 했다. 성가시지만 소화는 얼굴의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다녔다.   

  

소화의 콧구멍 부기가 가라앉을 즈음에 사과꽃 따기 작업이 이루어졌다. 사과꽃 중에서 중심 꽃을 남기고 주변 꽃을 따서 솎는 것이다. 주변 꽃을 따주는 이유는 양분의 소모를 줄여서 품질 좋은 사과를 얻기 위한 작업이었다.


꽃 따기 작업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흰 꽃길이 만들어졌다. 소화는 떨어진 꽃 중에서 하나를 집어서 향기를 맡고 나서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봄의 요정이 된 것처럼 천천히 꽃길을 걸으면서 과수원을 돌아다녔다. 봄에 누리는 소화만의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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