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그락딸그락’
과수원에 들어선 소화가 줄을 잡아서 당기니깐 깡통 소리는 고요한 과수원에 요란하게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자 사과를 먹고 있던 새들이 놀라서 ‘후다닥’ 날아가 버렸다. 사과꽃에는 꿀벌이 찾아왔듯이 사과가 익어갈 때는 새들이 날아와서 사과를 쪼아 먹었다. 용케도 잘 익어서 맛있는 사과만 먹는 새가 못마땅한 아빠가 반짝이는 줄을 띄워놓고 빈 깡통 등도 달아 놓았다. 그래서 소화네 식구들은 가을이면 오다가다 줄을 당겼다가 놓았다가를 습관적으로 했다. 그러면 ‘반짝반짝’하는 줄과 ‘딸그락’ 거리는 깡통 소리로 인해 새들이 후다닥 날아가 버려서 한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소화는 새들이 날아간 과수원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심호흡했다.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뱉을 때마다 소화의 어깨는 들썩였다. 그리고 소화의 콧구멍도 벌렁거리면서 코 평수가 넓어졌다.
여느 날 같으면 잘 익은 사과를 따서 옷에 ‘쓱쓱’ 문지르고 나서 먹었을 소화지만 지금은 냄새 맡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곧 난쟁이들의 사과나무에 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소화는 가을이 되면 직접 사과를 따서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런 즐거움도 사과가 나무에 달려 있을 때만 가능했다. 늦가을이 되면 수확한 사과는 저장 창고에 들어갔는데 이때부터는 엄마가 관리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크고 맛있게 생긴 사과는 팔아서 생활비로 써야 한다면서 식구들한테는 파과만 먹게 하였다. 그런데 쌍둥이 오빠만큼은 예외였다. 오빠한테는 언제나 좋은 사과만 주었다. 소화도 오빠처럼 이쁜 사과를 먹고 싶었다. 몇 번이나 엄마에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소화는 가을이 되면 크고 맛있게 생긴 사과를 직접 따서 먹기로 했다. 엄마가 보면 좋은 사과만 따서 먹는다고 혼나기 때문에 들키지 않게 따서 먹어야 했다. 그래도 오다가다 맛있는 사과를 따서 먹는 것은 늦가을에 누리는 소화만의 호사였다.
소화는 잰걸음으로 과수원을 가로질러서 언덕배기에 있는 ‘난쟁이들의 사과나무’로 향했다. ‘난쟁이들의 사과나무’는 과수원의 맨 가장자리 비탈진 곳에 다른 나무들과 동떨어져 홀로 있었다. 햇빛을 충분히 못 받아서인지 아니면 퇴비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해서 그런지 사과나무 중에서 유독 작았다. 사과도 다른 사과에 비해서 작았고 ‘띄엄띄엄’ 적게 열렸다. 엄마와 아빠는 ‘상품성이 없는 쓸모없는 나무’라고 베어버린다고 하는 것을 소화가 울고 불고 해서 간신히 아빠의 톱질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이 나무는 과수원 나무 중에서 유일하게 엄마와 아빠의 손길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소화의 나무가 되었다. 소화는 자그마한 이 사과나무를 ‘난쟁이들의 사과나무’라고 불렀다. 「난쟁이들의 사과나무」라고 푯말을 만들어서 사과나무 가지에 걸어두기도 하였다. 비록 사과의 크기가 작아도 맛은 어느 사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큼하고 달았다. 엄마와 아빠의 무관심 덕분에 소화는 그 맛난 사과를 늦가을까지 혼자서 먹을 수 있었다.
“안녕! 매일 내가 오니깐 좋지. 나도 너한테 오는 이 시간이 정말 좋아.”
소화는 ‘난쟁이들의 사과나무’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서 사과나무에 올라가려고 심호흡을 깊게 했다. 그리고 한쪽 발은 까치발을 하고 다른 발은 최대한 벌려서 나무에 걸치고 나뭇가지를 잡은 손에 힘껏 힘을 줬다. 그래야 엉덩이가 들려서 나무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능숙하게 사과나무에 올라간 소화는 가지들이 엇갈려서 교차된 틈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밑에서 ‘빵꾸똥꾸’ 하기에 딱 좋은 자세로 앉아서 과수원과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과 황금벌판. 그리고 붉게 물든 과수원을 바라보고 있던 소화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고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데 요즘 들어서 가끔가다 그랬다. 좋은 일이 있어도 그랬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울컥했다. 지금은 너무나 예쁜 풍경에 감동해서 소화의 마음이 벅차올라온 것이다. 소화는 고개를 젖혀서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봤다. 뭉게구름을 따라서 가을 하늘을 이곳저곳 둘러보다 보니 울컥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젖혔던 고개를 돌려서 앞을 바라보니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품앗이로 곡식을 거두고 있었다. 한동안 마을을 보고 있던 소화는 마치 현실로 돌아오듯이 과수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빨간 지붕을 중심으로 빨갛게 익은 사과로 인해 과수원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꽃 못지않게 사과가 이쁜 계절이 된 것이다. 과수원 아래에서도 시끌벅적하면서 일꾼들이 열심히 사과를 따고 있었다. 사과는 수확할 때도 정성껏 손으로 따야 좋은 값으로 팔 수 있었다.
한동안 아래쪽을 바라보던 소화는 생각난 듯이 주머니에서 시집을 꺼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시집으로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급문고에서 빌려온 것이다. 학교에서 읽다가 만 부분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소화는 엉덩이가 아프기 시작해서야 현실을 직시했다. 지금까지 사과나무 위에서 앉아있었음을 자각한 소화는 시집을 주머니에 넣고 옆에 있는 가지를 잡고 일어났다. 마침 앞에 있는 가지에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눈에 들어왔다. 소화는 조심스럽게 그 사과에 손을 뻗었다. 사과는 손에 닿을 듯 말 듯하고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그 사과를 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소화는 한 발짝 가서 그 사과를 잡았다. 그러나 손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그 순간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아얏!’
소화는 딱딱한 땅바닥에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놀란 소화는 어딘가 다친 곳이 없는지 걱정되어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였다. 손에 무언가가 있어서 확인해 보니 좀 전에 딴 사과가 들려있었다. 소화는 사과를 옆에 놓고 일어났다. 팔다리를 움직여보니 아프긴 해도 부러지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되었다. 옷에 묻은 흙을 ‘훌훌’ 털고 바닥에 있던 사과를 주워서 먹으려고 하는데 입술이 많이 욱신거렸다. 왼손을 입술에 대고 나서 확인해 보니 손에 빨갛게 피가 묻어났다. 떨어지면서 입술이 깨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떨어질 때 오른쪽 팔을 쭉 뻗어서 얼굴이 맨땅에 직접 닿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코가 깨졌을지도 모른다. 소화는 사과를 주머니에 넣고 얼른 자신의 방으로 가서 거울을 보았다. 입술이 생각보다 많이 깨져있었고 왼쪽 얼굴도 땅에 스쳐서 여러 군데 생채기가 나 있었다. 얼른 세수하고 안방에 있는 약상자를 가지고 와서 연고를 발랐다. 시간이 갈수록 입술도 부풀어 올라왔다. 할 수 없이 봄에 썼던 마스크를 찾아서 쓰고 있는 소화를 보고 엄마가 혀를 찼다.
“또 벌에 쏘였냐?”
“아니요.”
“그런데 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거야?”
“그냥요.”
“그냥 마스크를 쓸 이유가 없잖아. 얼른 마스크 벗어 봐.”
엄마의 강압적인 말에 소화는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세상에나! 이번엔 입술과 얼굴이야.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걷다가 돌멩이에 걸려서 넘어졌어요.”
“도대체 너는 누구를 닮아서 허구한 날 다치는 거야. 얼마나 천방지축이면 걷다가 넘어져서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 수가 있는 거야. 오빠처럼 조신하게 지내면 안 되겠니. 여자애가 얼굴에 흉터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혀를 차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난쟁이들의 사과나무’에서 떨어졌다면 더 혼이 날 까봐 거짓말을 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무를 베어버릴 것 같아서 소화는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저녁밥을 먹을 때였다.
“소화야! 밥 먹어.”
“밥 생각 없어요. 저녁 안 먹을 거예요.”
“밥 생각 없어도 한 숟가락이라도 떠.”
엄마의 재촉에 소화는 할 수 없이 저녁상에 앉았다.
“왜 마스크 썼냐?”
“내 맘이다.”
“갑자기 마스크를 쓴 이유가 뭐야?”
쌍둥이 오빠는 옆에 있던 소화의 마스크를 잡아당겨서 벗겼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부은 입술과 생채기가 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하하.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쌍둥이 오빠는 웃음보가 터졌는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다가 소화의 얼굴을 보고 또 웃었다.
“소철이도 그만 웃고 얼른 밥 먹어.”
엄마의 말에 쌍둥이 오빠는 그나마 진정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너는 감추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스크를 쓰는구나. 하긴 마스크를 쓰면 망가진 네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깐 나름 좋은 방법이긴 해.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입술이 두꺼우면 미인이라고 하던데 너도 그쪽으로 가봐. 분명히 미인으로 대환영을 받을 거야.”
언제나 그렇듯이 소화는 쌍둥이 오빠의 말을 무시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피가 났던 입술에 음식물이 닿으면 따갑고 아파서 밥을 먹기가 불편했다. 소화는 물에 밥을 말아서 호로록 마시듯이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까 딴 사과는 먹지 않고 책상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입술은 말할 것 없이 두껍게 부었고 따가웠다. 생채기가 난 얼굴은 흉터가 생길 것 같아서 연고를 부지런히 발랐다. 소화는 봄처럼 가을에도 한동안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