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윙’‘윙’ 소리만 들어도 소화의 손은 자동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파리는 소화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중할수록 소화의 팔이나 다리에 와서 앉았다. 마치 놀아달라고 하듯이.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던 소화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파리채를 찾았다. 그리고 파리를 향해서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잽싸게 휘두르는 소화의 파리채에 한 마리, 두 마리 파리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소화는 여기저기 널려있는 파리들을 파리채로 한꺼번에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책상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잡지에 있는 연예인 얼굴을 오려서 스케치북에 붙인 다음 얼굴에 맞게 옷을 그리는 중이었다. 다양한 옷을 그리다 보니 마치 의상디자이너가 된 것 같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소화가 이렇게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작년 학기 말 이후부터이었다.
소화는 쌍둥이 오빠보다 공부를 잘해서 반에서 주로 1등을 하였고 쌍둥이 오빠가 2~3등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축하의 말을 듣고 기쁘게 집으로 돌아온 소화와 대조적으로 시무룩한 소철이의 성적표를 보고 나면 항상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성적표를 받는 날이면 소화는 걱정이 앞섰다. 잘못한 것 없이 엄마와 오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학기 말 성적표를 보여드리자, 엄마가 다른 때보다도 더 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둘 다 대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소화는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졸업하면 바로 취업하라고 하였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을 들은 소화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적어도 고등학교는 인문계고등학교로 진학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소화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멀뚱멀뚱 엄마를 바라보고 있자 무안했는지 엄마는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
엄마가 한 말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소화는 반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니 하루하루가 따분하고 지루해서 무기력해 있을 무렵 우연히 잡지를 보게 되었다. 연예인들의 화장법과 스타일에 대하여 수록한 잡지였다. 그중 잡지의 일부가 찢어져서 연예인 얼굴만 있는 것을 보니 옷을 그려주고 싶은 마음이 충동적으로 들었다. 처음엔 연필로 옷을 그리다가 색연필로 그리니깐 더 멋지게 그려졌다. 그때부터 이것은 소화의 무료한 일상을 버틸 수 있는 활력소가 되었다.
‘벌컥’
느닷없이 문이 열리면서 쌍둥이 오빠가 들어왔다.
“왜 노크도 없이 맘대로 들어와?”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벌써 잊었냐. 저번에 노크 없이 네 방에 들어갔다고 엄청 뭐라고 했잖아.”
“넌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냐?”
“당연하지. 그냥 간 것도 아니고 너한테 간식을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욕만 실컷 얻어먹었는데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냐?”
“자고 있었는데 문을 벌컥 열어서 그랬잖아.”
“그 이후로 네 심부름을 안 하게 되었으니 다행이긴 해.”
“그런데 뭐 하고 있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뭘 물어.”
“하하하. 무슨 그림이 그러냐? 만화도 아니고 유치하게 그리고 있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누가 너한테 평가해 달라고 했어. 그리고 너는 좋은 말이라도 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냐?”
“네 말에 가시가 더 있다는 생각은 안 드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
“이러니 너하고 대화가 안 되는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더니 쌍둥이 오빠는 갑자기 얄미운 표정으로 대화주제를 돌렸다.
“너는 이제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서 좋겠다.”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까지 공부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어. 공부는 그냥 하는 것 아니야?”
“잘난 척하기는.”
“내가 양보해서 네가 공부하게 된 것이니깐 나한테 고마워해라.”
“누가 들으면 네가 내 공부시켜 주는 줄 알겠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너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데 우리 형편상 내가 포기한 것이잖아.”
“그러니깐 누가 나하고 쌍둥이로 태어나라고 했어?”
“너는 할 말이 없으면 꼭 그렇게 말을 하더라. 이제라도 내가 양보한 것을 알면 고마워할 줄도 알아야지.”
“맘대로 생각해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거든. 그런데 왜 왔냐? 용건이 있을 것 아니야?”
“참! 파리채 있지?”
“저기 방구석에 있잖아.”
“세상에. 얼마나 많은 파리를 살생했으면 파리채에 피가 이렇게까지 묻어있냐? 징그러우니깐 이 파리채에 묻어있는 피 좀 닦아줘.”
“싫어. 네가 알아서 닦아서 써. 나도 그랬거든.”
“하여간. 너는 내가 말만 하면 무조건 싫다고 하더라.”
“잘 생각해 봐. 내가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거든. 그런데 파리채로 파리를 잡을 수나 있겠니? 오히려 파리가 너를 잡겠다.”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냐? 내가 너보다 힘이 세거든.”
“웃기고 있네. 팔씨름 한 번 해볼까?”
“좋아. 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게.”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소화와 쌍둥이 오빠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아직 힘주면 안 되잖아.”
소화와 쌍둥이 오빠는 시작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하나 둘 셋’ 구령과 동시에 시작하기로 하였다. 3판 2승으로 하기로 하였는데 소화가 모두 싱겁게 이겼다.
“호호호. 너는 엄마 젖 더 먹고 와야겠다.”
“여자애가 힘이 세서 좋겠다.”
“당연히 좋지. 그러니 이젠 나한테 까불지 마라.”
“아이고 그러셔. 무서워서 너한테 말이라도 걸겠냐?”
쌍둥이 오빠는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소화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그리던 그림을 계속 그렸다.
“소화야! 소화야! 얼른 와 봐.”
엄마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소화는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엄마! 왜요?”
“시원하게 오이냉국 하려고 하니깐 밭에 가서 오이 2~3개만 얼른 따와. 혹시 모르니깐 장화 신고 들어가.”
“알았어요.”
소화는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동화를 꺾어 신고 밭으로 달려 나갔다. 오이냉국은 소화가 좋아하는 여름 음식 중 하나였다.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는 밭에는 오이, 가지, 고추, 부추, 콩 등 밥상에 올라오는 채소들로 가득했다.
‘아얏’
싱싱한 오이는 껍질과 줄기가 까슬까슬해서 잘 잡고 따야 했다. 2개를 따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개만 더 따려고 주위를 살펴보니 맞은편에 적당하게 크고 맛있게 생긴 오이가 있었다. 오이는 넝쿨 식물이라서 지지대를 타고 올라가게 해서 허리를 숙이지 않고 딸 수 있었다. 지지대 아래에는 풀들이 어느 정도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소화는 냉큼 맞은편으로 가서 찜한 오이를 따려고 손을 뻗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뭔가 찜찜해서 오이가 매달려있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름이라서 진한 녹색은 풀이려니 생각했던 소화는 너무나 깜짝 놀라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풀 들 속에 진한 녹색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가 바스락 소리에 고개를 쳐든 뱀과 눈을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소화는 바구니를 내던지고 소리를 지르면서 정신없이 밭에서 뛰쳐나갔다. 뱀을 본 것도 놀랄 일이지만 하마터면 발로 그 뱀을 밟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엄마! 엄마!”
“무슨 일인데 이 호들갑이야.”
“엄마! 밭에 뱀이 있어요.”
“밭에?”
“네. 하마터면 발로 밟을 뻔했어요. 진한 녹색 뱀이었어요.”
“장화는 신었겠지.”
“아뇨. 운동화 신고 갔었어요. 잠깐 다녀오는 거라서요.”
엄마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가까운 곳이라도 밭에 들어가려면 장화를 신고 가야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그런데 오이는 어디 있냐?”
“너무 놀라서 바구니와 땄던 오이도 내던지고 왔어요.”
“하여간 누굴 닮아서 그렇게 덜렁거리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밭으로 가서 바구니에 오이를 따서 가지고 오셨다. 미역과 함께 어우러진 오이냉국은 바로 밥상에 올라왔다. 식구들은 오이냉국이 맛있다고 잘 먹었지만 소화는 먹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오이와 뱀의 색깔이 비슷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그래서 소화는 이번 여름에는 오이냉국은 먹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