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소화와 민아는 분주했다.
소화가 커트한 손님의 머리를 빗자루로 쓸고 있을 때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민아는 손님의 머리를 감기고 있어서 소화가 빠르게 문 쪽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계시지?”
“예. 원장님! 박 사장님 사모님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예약을 안 하시고 오셨어요. 머리 하시려고요?”
“오늘은 내가 아니고 우리 애 머리 좀 하려고 하는데 시간이 되는지 모르겠네.”
“마침 시간이 비었어요. 따님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여기에 없었거든.”
“어디 갔다 왔는데요?”
“유학을 보내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몹쓸 애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놀기만 했잖아. 놀더라도 곱게 놀면 누가 뭐라고 하냐고! 이 애 머리 좀 봐봐. 웬만하면 그냥 두겠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데리고 왔지.”
“엄마는 내 친구들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몹쓸 애들이라고 하는데 정말 어이없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네가 이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너 이러고 다니는 것 아빠가 알면 너랑 나 둘 다 죽는 줄 알아.”
“내가 어쨌다고 맨날 나만 가지고 야단이야.”
“너 때문에 내 명에 못 살겠다. 오늘 갑자기 한국에 들어온 것은 아빠한테 뭐라고 설명할래?”
“뭐라고 하긴. 공부는 적성에 안 맞아서 못 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해야지. 여기에서도 못하던 공부가 미국 간다고 잘되면 누구나 다 유학 가겠지. 이젠 나보고 공부하라는 말을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이젠 이십 대 후반이야. 내 나이이면 공부보다는 시집을 갈 나이가 되었잖아. 공부보다 신랑 잘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이고 속 터져. 시집은 가고 싶긴 하니?”
“당연하지. 조만간 남자 친구 데리고 올 건데.”
“뭐라고? 설마 그래서 갑자기 귀국한 거야?”
“겸사겸사해서 왔지. 그리고 엄마도 보고 싶었고.”
“솔직히 말해 봐. 다른 일은 없는 거지?”
“무슨 다른 일?”
“급하게 결혼해야 하는 이유 같은 것 말이야.”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러니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
“그러면 다행이고. 아무튼 한국에 들어왔으니 조신 있게 지내야 해. 그리고 결혼은 네가 좋다고 해서 아무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야. 사람 됨됨이와 능력 그리고 집안 내력도 봐야 하는 거야.”
“염려 놓으셔. 엄마도 좋아할걸.”
“내가 좋아한다고?”
“응. 장담하건대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도 좋아할걸. 엄마와 아빠 모두 아는 사람이야.”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 누군데?”
“분명한 건 엄마와 아빠 모두 만족할 만한 사람이라는 거지. 그러니 더 이상 물어보지 말고 직접 만나 봐. 그런데 왜 나를 미장원에 데리고 왔어?”
“네가 이뻐서 데리고 왔겠니?”
“당연하지. 엄마의 이쁜 외동딸이잖아.”
“아이고! 말이라도 못 하면. 우선 머리 스타일부터 바꾸자. 노란 머리를 갈색 머리로 염색하고 층이 나서 지저분한 머리는 차분한 단발머리로 파마하자. 그래야 아빠도 뭐라고 안 할 거야.”
“난 엄마가 아빠를 이기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봐. 지금 아빠 눈치 엄청 보고 있잖아.”
“내가 우겨서 너를 유학 보냈잖아. 너 잘못되면 아빠가 나를 얼마나 원망하겠냐?”
“또 그 이야기야. 제발 그 이야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내가 내 발등을 찍었으니 어쩌겠냐. 원장님! 우리 애 갈색으로 염색하고 단발 파마해 줘요. ‘참하다’라는 소리 들을 수 있게.”
“파마와 염색을 동시에 하면 머리카락이 많이 손상될 수 있어요. 그래서 파마는 약하게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층이 난 머리카락부터 자르고 시작하겠습니다.”
원장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아 언니가 파마할 수 있도록 준비해 왔다. 원장님은 가위를 잡더니 빠르게 커트하기 시작했다. 원장님의 가위질은 소리부터 달랐다. ‘사각사각’ 언제나 들어도 경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빠르고 정확하게 커트가 되자 구르프를 말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소화는 소파에 앉아있는 사모님께 쌍화차를 가져다 드렸다. 사모님은 차를 마시면서도 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더니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원장님! 여기 아세톤 있지. 빨간색 매니큐어 지우고 분홍색이나 투명한 색으로 칠하면 좋겠는데.”
“엄마! 이젠 내 손톱까지 간섭이야. ”
“잔소리 말고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해. 파마 끝나면 백화점 가서 원피스라도 사서 입자. 지금처럼 찢어진 청바지에 배꼽티 입고 가면 아빠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우선 외모를 단정히 하고 나서 말해야 아빠가 귀담아들을 것 아니야.”
“이럴 때 보면 엄마는 철두철미하다니깐.”
소화는 모녀지간의 하는 말을 듣고 아세톤과 연한 분홍색 매니큐어를 준비했다. 사모님의 딸은 옆에 서 있는 소화를 보자 손을 내밀었다. 소화는 딸의 손톱에 발라져 있는 빨간색 매니큐어를 솜에 묻힌 아세톤으로 벗기기 시작했다. 두껍게 매니큐어를 바른 탓인지 솜에 아세톤을 듬뿍 묻혀서 비벼야 겨우 벗겨졌다. 솜에 빨간색이 묻어 나는 만큼 본래의 손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딸의 손가락은 길쭉하면서 부드러웠다. 이제껏 살면서 숟가락질 외에는 어떤 종류의 노동이라도 한 적이 없는 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 매니큐어를 지웠는데 이 분홍색으로 발라도 될까요? 아니면 원하는 색이라도 있나요?”
“그냥 그것으로 해 주세요. 내 취향은 아닌데 어쩌겠어요. 머리도 손톱도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신발도 새로 사야겠다. 군인들이 신는 워커를 신고 있네.”
“언제는 엄마 맘대로 안 했나. 맘대로 하셔.”
딸은 체념한 듯 무심하게 말했다. 딸은 이런 엄마가 익숙한 듯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반면 사모님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딸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사모님은 딸이 인형인 양 즐겁게 인형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모님은 단골손님이라서 머리를 자주 하러 왔었는데 지금처럼 주문이 많거나 까다롭게 한 적은 없었다. 딸의 머리는 4시간 정도 걸려서 완성되었다. 사모님은 완성된 딸의 머리를 보고 매우 만족해했다. 딸은 거울을 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모님은 수표를 내면서 거스름돈은 수고비라고 했다. 딸의 머리를 다시 한번 본 사모님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장원을 나갔다. 그 뒤를 딸이 맥없이 뒤따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