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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은율 Jan 05. 2024

스리랑카의 기차

여행은 고행

2018년 연말이다. 연말을 집안에서만 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남인도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인 '스리랑카'에 대해 알아보았다. '몰디브'도 있었지만 이미 다녀왔고, 몰디브에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지겨웠다. 스리랑카는 깨끗한 인도라길래, 어린 두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건 마땅치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구할 수 있는 한국 음식을 최대한 구해서 캐리어에 담았다. 큰 캐리어 두 개, 두 아이를 데리고 5박 6일 스리랑카로 떠났다.


스리랑카의 수도는 콜롬보다. 콜롬보의 호텔에서 휴양을 목적으로 쉬다가 오거나 담불라의 시기리야를 꼭 가보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시기리야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기엔 쉽지 않은 곳 같아서 과감하게 포기해야만 했다.



스리랑카로의 여행을 이끈 건 파란 기차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와라엘리야-하퓨탈레-엘라' 구간의 기차여행을 계획했다. (다만 염두에 두지 못한 건 많은 사람 때문에 서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거다.)


네곰보 공항에 도착해서 캔디까지의 이동, 저렴한 숙소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 누와라엘리야까지 택시를 탔다. 2시간 30분 넘게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야만 했다. 중간에 티 팩토리에 들려서 차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좀 쉬다가 또 달려서 누와라엘리야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창문을 열면 호수가 보였는데, 산간 지역이라 그런지 추웠고 준비해 간 긴 옷을 입어야만 했다.


먹을 게 마땅하지 않아서 준비해 간 컵라면과 햇반 등을 데워서 저녁으로 먹었다. 다음 날 오후, 하퓨탈레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나누오아 기차역으로 갔다. 2등석 기차표였지만 기차가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기차가 만석을 이루어서 탈 수가 없었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사람들이 비교적 덜 몰리는 3등석을 노렸다. 다행히 기차는 탔지만 자리가 하나뿐이었다. 나는 첫째를 안고 앉았고, 남편은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두 시간을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서서 가야만 했다. 그나마 다음 날 엘라 당일치기 기차는 나은 편이었다. 그때는 자리가 두 군데 나서 첫째가 혼자 앉고, 내가 둘째를 앉고 갔다. 남편은 또 서서 갔다. 딸과 같이 앉으라고 했지만 그는 서서 가는 편을 택했다.


훗날 남편은 말했다. 스리랑카에 다시 한번 더 가고 싶다고.


이유를 묻자, 스리랑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라고. 그는 유모차에 앉아 있던 아이가 울자 안아주고, 그 상태로 내내 하퓨탈레로 향해야만 했다는 거다. 새삼 여행 내내 불평을 하지 않는 남편에게 감사했다. 생각해 보니, 휴양이 목적이 아닌 여행은 모두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매번 여행의 순간이 오면 '쉴 수 없는' 여행을 선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혹은 호텔방에서 쉬다가 오는 여행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엘라에서 하퓨탈레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둘째가 몹시 울었고, 안아 달래느라 진땀을 뺐더니,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인 건 분명했다.


남편에게 스리랑카가 의미 있는 건, 릴리게스트하우스 사장 '라임'때문이었다.


남편은 부킹닷컴에서 하퓨탈레의 방갈로 숙소를 예약해 뒀다. 라임은 기차역에 우리를 픽업 나온 기사였고, 우리가 말한 주소에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방갈로에 닿기 전, 커다란 철문이 잠겨 있었고,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팻말이 붙어 있는 거다. 이미 숙박비는 빠져나간 상태였는데, 현지 사정상 영업은 하지 않는다니 난감했다.


3개월 전, 자이살메르의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거다. 편은 아고다에서 자이살메르의 사막에서 하룻밤을 보내자며 숙소를 예약했는데, 그때도 돈만 빠져나가고 리모델링 중이었다. 그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번 경험했던 터라 이번에는 무덤덤했다. 기사에게 묵을 만한 숙소를 알려달랬더니,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게 된 릴리게스트하우스. 사실 게스트하우스의 컨디션은 호텔룸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만, 깨끗하기만 하면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두 아이는 좋아했다. 두 아이는 마음껏 뛰고 장난칠 수 있는 공간이면 어디든 좋아했다. 게다가 음식도 원하는 걸 요청하면 된다. 아이를 위해 계란프라이도 해달라고 할 수 있고, 계란볶음밥도 해달라 할 수 있다.


릴리게스트하우스에서 먹은 저녁이다. 비주얼은 별로이긴 한데, 맛은 괜찮았다. 가격이 싸진 않았다. 스리랑카의 음식에는 거의 '생강'이 들어간다. 이 점은 인도 음식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스리랑카는 '생강'의 나라라고 봐도 될 거다.


라임은 다음 해 남편에게 연락을 해왔다. 우리가 다녀오고 얼마 뒤, 스리랑카에 테러가 발생했고 관광객이 발길을 끊어 생계가 어려워졌다는 거다. 남편은 그 얘기를 듣고 진심으로 라임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한번 더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져서 우린 가지 못했다.)



하퓨탈레의 '립톤씻'에서 마신 차. 비주얼은 인도 짜이와 비슷하다. '립톤씻'이...'Lipton's seat'이라니! 우리도 줄을 서서 립톤 아저씨가 앉아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립톤이 내려다보고 감탄했다던 그 뷰를 바라보고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갈 버스를 탔다. 운전기사는 그 좁은 길을 유연하게 빠른 속도로 잘 달렸다. 곳곳에 타밀 여성들이 찻잎을 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스리랑카는 인도 남부 타밀족과 스리랑카의 '상할라족'과의 긴 내전이 있었던 국가였다. 그래서일까. 관광자원이 펼쳐 있어도 그들에게서 가난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우리가 있는 곳이 도심지가 아니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의 순박한 미소와 친절은 곳곳에 있었다. 어딜 가나 두 아이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립톤씻에서 내려와 엘라로 가는 오후행 기차를 탔다. 나인아치브리지를 보러 가기 위해서다. 기차역에서 오토릭샤를 타고 나인아치브리지에 데려달라니까, 근처까지 와서는 내려서 걸어가야 한다고 했다. 한 30분 간을 좁은 비탈길, 산길을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남편이 둘째를 안았다. 올라올 때는 남편이 첫째를 안아야 해서 내가 둘째를 안았다. 걷다가 중반쯤 왔을 때 본 나인아치브리지는 거대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깎아지른 절벽처럼 느껴졌으며, 거기에 사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그 브리지를 둘러싼 거대한 숲은 정글숲처럼 보였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우리도 다른 관광객처럼 나인아치브리지에 올라가 앉아 사진을 남기고 있는데, 갑자기 기적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엘라에서 저녁까지 먹고 밤기차를 타고 하퓨탈레로 돌아왔다. 라임 사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라임은 다음날, 캔디까지 데려다주었다. 캔디에 예약해 둔 호텔에 가기 전, 노리다케 공장에 먼저 갔다. 거기서 노리다케 B급 그릇을 3만 루피 정도의 가격만큼 구매했다. 이 그릇은 아직도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다음날 아침, 캔디에 있는 불치사를 찾았다. 스리랑카는 불교국가라, 더 친근감이 들었던 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불상에 꽃을 공양하기 위해서 꽃을 구매하고 사람들을 따라 불교사원에 들어갔다. 아이는 자신의 손에 고이 연꽃을 올려두고, 조심스럽게 잘도 걸었다.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맨발로 다녀야만 한다. 아이들은 맨발이 되는 순간 더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인도에서 맨발로 살았던 시간이 제법 있어서일까, 어딜 가든 신발을 벗는 행위는 아이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듯하다. (가령, 식당에 가면 좌식이 아닌데도 신발을 벗고 밥을 먹는다든가...)


돌이켜보니, 스리랑카 여행은 '나'를 찾기 위한 시간이었다기보다는, '남편'을 더 알게 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결혼 후, '나'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지워져 가고 반대로 '엄마'라는 존재가 커져만 갔는데, 그것은 남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연인에서 아이의 아빠 역할로 옮겨가야만 했던 시간들.


그 과도기를 거쳐 우리는 삼십대 후반에 이르렀고, 서로의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누구보다 다정한 연인이었으며, 이제는 누구보다 다정한 아빠가 되어 있었다.


나는 두 아이를 품에 안고 저만치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기억해야 할 것 있다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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