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싱가포르 방문이었다. 원래 계획은 나이트 사파리, 동물원, 식물원, 유람선 타기 등 하루에 일정 두 가지씩은 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둘째가 돌 무렵,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그때는 아이 둘다 어려서 수영장에서 잠깐 놀고, 유모차를 이용해서 여기저기 다녔다.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면 이동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일곱살이 된 둘째는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고 징징거렸다. 첫째는 어디든 갈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으나, 둘째는 호텔 방 아니면 수영장 이 두 가지만 원했다. 남편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나 홀로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여행이었기에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아메다바드 밤 비행기를 타고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아침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바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로 갔다. 이른 시각이라 체크인은 안되나 인피니트 수영장은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캐리어에서 바로 수영복을 꺼내서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의 인피니트 수영장은 타워 1, 2, 3이 모두 연결된 배모양의 수영장이다. 뱃머리는 타워3쪽에 있다. 이 수영장은 아름다워서 인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 이 수영장을 만났을 때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때는 삼십 대였고, 살도 많이 찐 편이 아니라 자신 있게 비키니도 입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비키니를 챙겨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거의 잠을 못잔 상태라서 썬베드에 누워서 책보다가 잤다. 아이들은 물에서 자기들끼리 잘 놀았다.
점심 때가 되어도 나올 생각이 없는 두 아이를 위해 간단하게 먹을 점심과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맥주 한 잔 가격이 사악해서 그 다음부터는 풀장에서 시켜 먹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와 호텔방 미니냉장고에 채워두고 마시고 싶을때 언제든 꺼내 마셨다.
우리가 머문 3박 4일중, 거의 3일간 비가 내렸다. 그리고 3일간 풀장에 갔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은 수영장은 임시폐쇄하기도 했다. 그러면 수영장 밖에 나와서 비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를 맞으며 수영장에서 놀다 보니 아이들의 입술이 새파래졌다. 억지로 달래서 방으로 와 씻기고, 음악을 들으며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사실 싱가포르 여행 통틀어서 그냥 조용히 책 보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고 말하면, 너무 사치스러운 걸까 혹은 너무 밋밋하거나 재미없는 것일까.
6년 전, 센토사에도 갔었고,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갔었건만 그때도 비가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놀이기구 두 개 정도 타고 나와야만 했다. 머리이언 상 세 가지도 모두 봤고, 하지레인도 가봤고, 가든스 더 베이 야경과 레이저쇼도 봤고 유람선도 탔고, 싱가포르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칠리크랩도 먹어봤지만......그 당시 어린 두 아이때문에 경황이 너무 없어서, 사진을 보면...넋이 나가 있다고 해야하나...
두 아이를 이끌고 야경을 보러 갔을 때,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젤라또 하나씩 먹여서 그런가, 둘다 신이 나 있었다.
다음 날, 호텔에서 하지레인까지 걸어갔는데, 구글맵을 찍으니 30분이 걸렸다. 30분 걸린다고 하면 안 간다고 할 게 뻔해서, 가까운 곳이라고 말하고 나선 길이었다. 한 15분쯤 걸으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린 비를 맞으며 하지레인에 도착했고, 둘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레인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았다. 또 젤리 가게도 갔다. 먹는 동안은 괜찮았지만 금세 둘은 시무룩해졌다. 하지레인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6년 전의 기억때문에 온 곳이었다. 이곳에서 셀피 커피를 마셨는데... 가족 사진을 찍고 사진이 커피 위에 인화된, 정말 신기한 커피였다. 그런데 있어야 할 자리에 커피숍이 없었다. 구글맵에 검색해보니 폐업했다고 떴다. 마음이 심란했다. 마치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하지레인에 온 목적이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셀피커피가 있던 자리였을지도 모를 음식점에 들어가 맥주와 과일주스를 시켰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택시타고 호텔로 돌아 왔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하지레인은 싱가포르의 기념품을 산 곳으로 남을 것이고, 내게 이곳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사람도, 장소도, 건물도...시간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준 곳이었다.
그 후로 계속 인피니트 수영장에서 보낸 기억밖에 없다.
레이져 분수쇼를 두 번 봤고, 걸어서 머라이언 파크에 다녀왔다. 그냥 호텔 주변에서만 4일을 보냈다.
나쁘지 않았다. 인피니트 풀장에서 화려한 싱가포르의 야경을 바라보며, 홍콩의 빅토리아 피크를 떠올렸다. 야경 하면 홍콩과 싱가포르 두 도시가 떠오른다. 둘다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만약 다음에 다시 싱가포르에 온다면, 그때는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에 투숙하지 않을 생각이다. 가격이 비싼 편이기도 하고, 맨처음 이 호텔에 묵었을 때의 느낌을 가질 수 없어서다. 더 이상 설레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갔던 곳을 다시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가지 않은 곳으로 떠나고 싶다.
아이 둘과 함께 했던 여행이기에 무리를 하지 않았고, 최대한 편하게 있다가 왔다.
정말 제대로 휴양하고 온 셈이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와서 싱가포르 여행에 대해 종종 말하고 한다.
호텔도 좋고, 수영장은 더 좋고,
호텔과 연결된 몰의 식당가에서 먹었던 밥도 맛있었다고.
또 가고 싶다고.
아이들의 기억속에 소중하게 자리잡았으면 되었다.
열흘 넘게 떠나 있다가 집에 돌아왔을때 일상이 참 감사하고 행복하더니, 일상에 적응하고 나니 다시 여행지에서의 나날이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