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셋은 매일 학교에서 붙어다니는 삼총사였다. 오죽하면 선배들이 '양양시스터즈'란 별명도 붙여줬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함께 도서관에 달려가서 학회 준비하느라 자료 찾고, 같이 공부하고, 글 쓰느라 머리를 쥐어짜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진솔한 얘기도 많이 나누었다.
우린 스무 살에 서로를 알게 됐다. Y는 나와 같은 여고 출신이었고, 옆반 반장이었다는 거 정도만 알았고, N은 같은 과에 입학했고 아주 차분하고 얌전한 아이라는 거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나는 그때 신입생들이 많이 분포해있는 무리 속에 들어가 우르르 몰려다니며, 내가 생각했던 과의 느낌과 분위기가 아니라며 절망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스무 살의 여름이었던가. 우연히 방문했던 한 학회의 모임에서,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만났다. 그 이후로 나는 시창작학회를 탈퇴하고 문학비평이론학회를 기웃거렸다. 그곳에서 우리 셋은 만났다.
우리는 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문학'이란 이름으로 묶였고, 그 아래에서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던 끈끈한 시간들. 서로의 진로가 달라져서 접점의 영역이 사라져 갔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주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Y의 제안으로 큐슈여행을 떠났다.
아직 기억난다. 주말과 3월 1일 공휴일을 끼워 2박 3일을 왕복 쾌속선을 타고 다녀오는 거였다. 거제도에서 배를 타본 적이 있었기에, 별 무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파도가 심하게 울렁거렸다. 좌우로 흔들거리는 정도가 생각보다 심해서, 마음속에 불안감과 의구심이 증폭했다. 누구 하나, 안전할 거라고 안심하라고 말해주는 이가 없었고, 나란히 앉은 우리 셋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채, 각자 얼어붙었다. 그날 밤 숙소에서 본 일본의 기상청 뉴스에는 해일에 대한 속보기사로 가득했다. 우리 다음으로 출발하려던 쾌속선은 취소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쾌속선에 대한 두려움을 빼면, 나머지 일정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일본어를 잘하는 N덕분에 더 깊이 있는 여행이 되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Y는 캐나다, 미국, 거제도를 거쳐 돌아왔고, N은 일본, 서울을 거쳐 경북에 살게 되었고, 나는 인도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셋이 만났던 자리에서 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얘들아, 나 있잖아. 그날 이후로 배 안 탄다. 그랬더니 Y와 N도 모두 말했다.
나도 그래.
우리 다음 여행은 무조건 비행기다. 앞으로 배는 타지 말자.
14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그날 쾌속선을 탔던 공포감에 대해 나눌 수 있었다.
그날의 공포가 너무 컸기에, 그 여행에서는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여행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우린 또 떠날 것이다.
여행의 묘미는 '함께' 하는 '수다'에 있고, 꺄르르 넘어가는 '웃음' 속에 있다. 우리 셋은 만나면 항상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