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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은율 May 09. 2024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지금 우리는 실내에서든, 이동할 때든, 바깥이든 휴대폰 앱 유튜브에 듣고 싶은 곡을 검색해서 손쉽고, 빠르게 들으며 살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쯤의 기억을 되돌려보면, 무척 즐거운 때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집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는데, 집을 향하는 길목에 서점과 음반 가게가 모두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빠가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은율아, 너 줄려고 사왔다!"

아빠의 손에는 작고 새까만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가 있었다.

나는 이후, 매일 밤마다 아빠가 주신 플레이어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책을 읽거나 뭔가를 끄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중1때 음악 선생님은 대학 졸업 후 갓 부임해 오신 젊은 여성이었는데, 피아노를 전공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첫만남에서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선생님의 첫사랑은 쇼팽의 폴로네이즈 '영웅'을 정말 잘 쳤다고 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서점 옆에 있던 음반 가게에 들어갔다. 사장님께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찾고 있다고 하자, 바로 꺼내 주셨다. 나는 4~5000원을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와 매일 밤마다 쇼팽의 폴로네이즈만 듣기 시작했다. 나에게 '영웅'은 '첫사랑'이자 '낭만'이란 이름이었다. 14세 소녀가 품고 있는 사랑에 대한 동경이자 피아노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다. 그후, 쇼팽의 발라드 테이프도 구입해서 듣고 또 들었다. 쇼팽의 피아노곡을 들으면서 나는 여중을 졸업했고, 여고를 졸업했으며, 후에는 카세트 테이프가 아닌 CD플레이어를 갖게 되었다. 나중에는 미키 마우스 모양의 mp3 플레이어를 목에 걸고 다니며 듣는 시절이 왔다.


지금은 무선 블루투스 이어폰과 휴대폰 하나로 온갖 종류의 소리를 듣는다. 내가 연주한 피아노 소리를 듣고, 유튜브에서 찾은 조성진의 쇼팽 연주곡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씩 오래전 젊었던 아빠가 딸을 위해 깜짝 선물로 가져다 준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를 그리워한다. 그것은 진한 향수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검정 라디오가 있던, 북향을 바라보던 작은 내 방. 문을 닫아놓고 홀로 음악 속에 귀 기울이던 내 영혼. 어떤 날은 피아노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펑펑 울기도 하였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선율따라 설레기도 하였다.


그 시절보다 내가 듣는 음악의 범위는 한층 넓어졌고, 알게 된 클래식의 양도 많아졌다. 하지만 난 여전히 쇼팽 폴로네이즈 '영웅'을 가장 좋아한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열네 살의 나와 마주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쇼팽을 연주할 날이 올까?

피아노 선생님께 조심스레 물었다. 언젠가는 저도 연주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럼요, 할 수 있어요.



나의 도전, 나의 소망, 나의 기쁨, 나의 열망.


그리고 풍요로운 마음,


음악이 있는 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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