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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은율 Apr 11. 2024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에,


한 2주간 내내 흐리고 비오기를 반복하다가 3월이 가버렸다. 장을 보러 다니는 길가에 벚꽃은 아직인 것 같았다. 그후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 흐린 날씨 속에서 확 피어 있는 게 보였다. 사진에 담으니, 하늘처럼 꽃도 흐리게만 보였다. 그것은 내 마음이 투영된 풍경이었다. 일주일 간의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의 상태를 겪은 후, 일주일 간은 답답하고 속상했고, 이후는 심한 무기력증을 앓았다. 글을 쓰는 일, 책을 읽는 일, 드라마를 보는 일이 시시했고, 꽃을 봐도 심드렁했다.


작년의 봄이 어떠했는가, 내가 어떻게 봄을 맞이했고, 어떻게 보냈는가를 생각해보면 올해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터무니 없게도 무감각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의무적인 일은 지속되었다.


세 끼 밥을 먹어야 했고, 애들 밥을 먹이고, 학교를 보내고 하교때 마중을 나가고, 저녁 공부를 봐주고 주말이 오면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아이 둘은 떨어지는 꽃잎을 잡아보겠다고 폴짝폴짝 뛰었다. 벚꽃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어느 날은 커피숍에서 책을 보고 오다가 벤치에 앉아서 발치에 굴러다니는 꽃잎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자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벚꽃이 아름다운 명당 자리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 조용하면서도 예쁜 장소, 나만 알고 싶은 곳 중의 하나이다. 나는 탭과 이북리더기를 넣어다니는 파우지에 붙여두었던 와펜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P'가 있어야 할 자리에 꽃잎으로 채워넣었다.


HO  E


기쁜 마음으로 작년 봄 꾸몄던 파우치, 'HOPE'는 새로이 시작하는 내 꿈을 향한 열망이 담긴 단어였다. 'P'가 빠져 나간 자리를 손으로 만지면서, 희망이란 글자가 망그러졌다고, 부스러졌다고, 나도 모르게 '비극'과 '절망'과 '자조'를 섞은 미소를 보내려던 찰나였다. 꽃잎 하나가 툭 떨어져 내 무릎에 닿았다. 또 하나가 보라색 파우치 위로 떨어졌다. 그곳에 꽃잎을 새겨 넣으며, 절로 웃음이 났다.


완벽하지 않은 희망이면 어때.

조금은 어긋난 희망이면 어때.


'HO E'는 마치 또 다른 나인 것처럼 벤치에 놓인 채, 나를 올려다 보았다.

 

집에 돌아와 꽃과 꽃병을 주문했다.

생각보다 비싸서 며칠을 망설이던 꽃병이었다.



꽃을 받아 서재에 두고, 거실 테이블에 두고 오고 가며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름다운 것이 내 안에 전염되고 있었다.


집 밖을 나서면 떨어진 꽃들이 수북이 쌓여서 바람에 춤추고 있었고, 집 안에 들어서면 시들어가는 꽃 사이로 꼭 피어내리라고 다짐하는 듯한 봉오리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마치 분갈이 하듯, 다이소에서 추가로 사온 꽃병에 봉오리만 있는 줄기를 나누어 담았다.

아직은 입을 앙다물고 있지만, 언젠가 활짝 필 거라 생각하니 그 시간들이 기대되었다.


나를 향해 벚꽃 뭉치를 던지던 아들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신나게 웃느라 망가진 나의 얼굴이 담긴 사진들.


이렇게 꽃의 시간들은 저물고, 초록이라는 든든한 시간들이 찾아오고 있다.


꽃이 새긴 'HO E'의 열망을 간직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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