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아이를 몰아붙이다
아이는 나의 집요한 설득에 못 이겨 결국 미술을 선택했다. 나는 아이의 생각을 존중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이는 아빠의 반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미술을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이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을 수 있었다. 아이가 우울증 진단을 받은 이후 쏟아낸 분노 중 하나였다. 자신의 진로가 아빠의 압력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 나는 처음에 부정했지만 이제는 수긍한다. 만 열세 살 아이에게는 강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진로에 영향을 주었지만 당장 예고입시를 준비하려 하지는 않았다. 음악이나 무용과 달리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예고에 가는 게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술 전공 입시를 알아볼수록 예고 진학을 못하면 국내 미대 입시는 매우 불리해진다는 사실(?) 아닌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강남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예중 입시를 준비한다는 걸 알았다. 더 늦기 전에 예고 준비를 해야 했지만 초반부터 무리를 하면 아이가 버틸 힘이 없을 것 같아 1학년 여름방학에 동네 학원에서부터 상대적으로(?) 가볍게 실기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를 예고 입시로 인도한 이유는 국내 미술 입시 환경에 따른 불가피한 면도 있었지만 예고 합격이 아이에게 자존감을 키워주는 한편 새로운 환경을 통해 어릴 적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나의 목표는 성공을 했지만 내 의도대로 아이의 상처가 치유되지는 못했다. 아이는 입시의 성공에 큰 자신감을 얻었지만 새 학교에서 또 다른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의 뿌리 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했는데,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아이의 상처를 후벼 파는 짓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고 입시를 준비하면서 아이와 나는 잦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그 첫 번째 사건은 중학교 2학년 때 로봇 동아리를 탈퇴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아이에게 동아리와 미술학원을 병행하도록 허락하는 대신에 미술학원 수업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은 취미이기 때문에 대회 참가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이 어리석은 나의 결정은 아이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동아리 활동을 하다 보면 대회 참가는 아이들에게 당연한 목표가 되었고 모두가 대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내 아이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이가 다시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급기야 대회 준비로 미술학원 수업을 빠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는 미술과 동아리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아이를 압박하였고 미술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결정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아이의 원대한(?) 꿈을 조금이라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악역을 맡았지만 그때는 아이의 진로와 미래를 걱정하기 전에 아이가 다시 또래집단 속에서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야 했던 시기였다. 나는 그 중요한 계기를 아이에게서 박탈한 것이다.
초등학교 때 아이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동아리를 나는 억지로 아이에게서 떼어 놓아 버린 것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터무니없는 명분으로 말이다. 아이는 그곳에서 똑똑한 선배들을 알게 되었고 전교 상위권을 다투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아이는 우쭐했다. 나는 그런 아이의 생각이 현실과 부딪히면서 산산이 깨어질까 두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중학교 2학년 첫 시험에서 아이는 형편없는 성적(중1은 진로탐색 학년으로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을 받았고, 그 성적으로는 내신을 중시하는 예고 입시(미술은 60% 내신, 40% 실기로 입학생을 선발한다)에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수준이었다.
대학생 과외를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아이는 바닥권의 성적을 받았고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집중력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학원강의가 적절치 않아 과외를 붙였는데 책임감 없는 대학생 과외선생은 학원만도 못했다. 결국 나는 입시용 내신 성적을 만들기 위해 남은 1년(2학년 2학기와 3학년 1학기) 동안 아이의 맞춤형 과외선생이 되었다. 동아리 탈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에 나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예고에서는 내신 절대평가를 통해 20등급으로 성적을 환산하는데 2학년 1학기 아이의 등급은 14등급으로 합격권(8~10등급)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나는 그런 아이의 성적을 두 학기만에 9등급으로 올려놓았고 결국 실기에서 좀 더 선전을 한 아이는 원하던 학교에 무난히 합격했다. 아이는 자신의 내신성적이 오르는 것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지만 동아리를 그만둔 이후 다시 학교에서 은둔자가 되어 있었다. 그때 아이의 상실감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미어진다. 특히 본격적으로 수험생 신분이 된 3학년부터 강남의 유명 입시학원에 다니며 하루 12시간씩 실기수업을 받는 지옥 같은 수험생활을 감당하게 했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는 나조차 이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곳에서는 예중준비를 하는 초등학생들도 그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아이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눈에 띄게 지쳐갔다. 평소 알레르기가 심했던 아이는 가끔 그 핑계로 학원을 조퇴했지만 9개월이 넘는 기간을 온전히 버티어냈다. 중간중간 숨 막히는 수험생활을 견디기 어려웠던 아이는 학원을 마친 밤늦은 시간에 동네 공원에 나갔고 우울감과 자살사고가 반복해서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런 아이의 상태를 외면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 총구를 벗어난 총알처럼 성공이든 실패든 과녁까지는 도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컨디션을 위해 각별하게 아이를 챙겼지만 이미 아이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아빠였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아이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나에게 뱉어낸 비난들이 전부 이해가 된다. 아이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아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만 가끔씩 내뱉는 아빠에 대한 서운함을 듣고 있으면 정녕코 그 방법뿐이었을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아이는 체력적으로도 힘든 수험생활 중에 또 하나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3학년 때 불쑥 들어간 강남의 입시학원에서 내 아이는 불청객이었다. 가뜩이나 또래집단과의 관계 맺기가 불편한 아이에게 강남의 아이들은 난생처음 보는 부류의 아이들이었다. 그 박힌 돌 사이에서 내 아이는 잔뜩 주눅이 든 걸 들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 또한 염려했던 일이었으나 기존의 다니던 학원에서 아이의 입시를 위해 선의로 추천해 준 곳이었기에 포기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나는 그 무시무시한 순간들을 아이가 힘겹게 넘어온 것을 알았지만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이 그 연장선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과거의 상처를 지우고 새 출발을 하려고 단단히 별렀는데 1학기 첫 중간고사를 망치고 난 뒤에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진작에 쓰러졌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이는 놀라운 인내력으로 버텨왔는데 야심 차게 준비했던 고등학교 생활의 첫 단추를 잘못 꿰는 순간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