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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Oct 06. 2023

무엇이 달라진 걸까?

학교에 돌아오다

6개월 전에 아이는 마비에 시달렸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지팡이나 목발 심지어 휠체어를 동원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절정은 2월 말이었고 덕분에 야심 차게 준비했던 일본여행을 시원하게 말아먹기도 했다. 그때 비로소 멈춰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 아이는 쉬어야 할 때란 걸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3월 내내 학교에 가지 못했고 학업중단숙려제로 한 달을 쉬고 푸른나무재단의 일시보호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는 조금씩 다시 일상을 회복했다. 물론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루에 한 가지 정도의 일정을 꾸준히 소화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무력감이 심했고 우울감이 수시로 찾아왔지만 아이는 자신만의 루틴을 아주 조금씩 만들어냈다. 그래도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누워서 지냈고 스마트기기에 의존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는데 아이가 다시 걷는 걸 힘들어했다. 학교에 다시 돌아가려 할 때 오히려 증상이 심해졌다.


겁이 덜컥 났다. 처음부터 교실에 들어가기를 기대한 것도 아니고, 모든 수업을 소화할 거라 보지도 않았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대면하는 걸 힘겨워했으니 처음에는 위클래스 상담실로 등교를 해서 조퇴를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런데 복교가 가시화되면서 아이의 몸에서 예전의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 같아 걱정이 컸다. 다시 학교 문턱도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이 앞섰다. 그런데 증상이 전과는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학교에 가기 전날부터 불안감이 컸고 밤에 잠을 못 이루다가 급기야 새벽에 신체마비가 오곤 했다.


지금은 공황 증상이 없는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걷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 증상이 갈수록 심해졌기에 우리는 다시 심리적인 부분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엔 이르지만 과거의 증상이 반복되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이는 과거와 같은 불안을 경험하지 않고 있으며 힘겨워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있다. 오랜 은둔(?) 생활로 인해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고 근손실이 오면서 나타난 결과로 보는 게 더 타당했다.


다만 증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추석 연휴를 지나면서 의외로 쉽게 문제가 풀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얼마 전 오랜 숙고 끝에 1년 동안 다니던 정신건강의학과를 옮겼는데 단 한 번의 진료와 처방으로 아이는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놀라워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진작에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다.


아이는 오래전부터 정신과 병원 진료를 힘겨워했다. 기존의 병원이 예약제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시간이 긴 데다 불친절한 직원의 응대가 아이를 힘들게 했다. 결정적으로 의사와의 1대 1 대면진료를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진료 때마다 내가 배석을 해야만 했다. 누가 봐도 제대로 된 진료와 치료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국 병원을 옮겼다.


병원을 옮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병원이 바뀐다고 아이의 태도가 달라질 것인가에 의문이 있었다. 제대로 수소문해서 찾지 않는 한 기존 병원과 다르지 않게 운영될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여러 병원을 알아보았지만 큰 병원은 예약 잡기가 어려웠고 작은 병원은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푸른나무재단에서 주관한 청소년 우울증 관련 온라인 강의를 인상 깊게 듣고 해당 강사의 병원을 찾게 되었다.


기존 병원과 새 병원의 가장 큰 차이는 예약대기 시간이었다. 새로 찾은 병원은 30분 단위로 한 명만 예약을 받기 때문에 제시간에만 가면 대기가 없었다. 기존 병원은 예약취소가 많다는 핑계로 30분 내에 세 팀 이상의 예약을 받는 것 같았고 어떤 날은 예약을 하고도 한 시간 가까이 대기해야 했다. 두 번째 차이는 대기실의 분위기였다. 기존 병원은 앉을자리가 부족할 만큼 대기자가 많았고 소음이 그득했다. 아이는 특히 병원 관계자, 다른 환자 및 보호자의 시선을 불편하게 의식했다. 지금의 병원은 당연히 그런 일이 없다.


의사의 차이는 더 극명했다. 기존 병원은 청소년의 경우 보호자와 먼저 면담을 한 뒤에 환자를 보고 처방을 내렸다. 새 병원은 절대 환자를 배제한 채 보호자와 의사가 대면하지 않는다. 무조건 환자를 먼저 보고 환자가 배석한 상태에서 보호자와 면담을 했다. 즉, 환자에 대한 보호자의 주관적 의견을 원천 차단했다. 기존 병원은 아이가 의사와의 독대를 거부한 이후 형식적으로 아이를 봤으며 대부분 보호자를 통해 모든 증상을 들었다.


약 처방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존 병원의 과거 처방전을 모두 가져갔다. 의사는 기존의 처방전을 매우 신중하게 보면서 자신의 컴퓨터에 일일이 그 내용을 기록했다. 그리고 기존의 처방전에 익숙해 있을 환자에게 아주 조금만 처방을 바꿔서 내겠다고 안심시켰다. 그런데 실제 처방은 어마어마하게 심플해져 있었다.


일단 1일 최대용량으로 몇 달째 복용하던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처방에서 모두 빼버렸다. 다른 우울증 보조제나 신경안정제도 대부분 절반 이상으로 용량을 줄여 버렸다. 비슷한 성분의 약인데 제조사만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파격적으로 용량을 줄였다는 걸 나는 집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슬며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새 처방전은 2주 치였고 추석연휴가 지나고도 한주 후에 다음 진료가 잡혀있었다.


갑자기 약이 줄었을 때 아이에게 변화가 있을지 몰라 우린 한주 내내 전전긍긍했지만 아이는 어지러움을 좀 더 호소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다. 오히려 불편해하던 여러 가지 신체증상이 한결 완화되었고 전보다 활기가 생겼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계획대로 학교에 두 번이나 무사히 등교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아이는 아침마다 힘겨워하던 증상이 한결 줄었다. 그저 약을 줄였을 뿐인데 말이다.


아이의 우울감은 전혀 심해지지 않았다. 대체 아이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동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우린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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