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낙산우공 Oct 15. 2023

13일의 금요일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샴페인을 터트리려던 건 아니었다. 갈 길이 멀었고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 왔다. 그런데 조금 긴장이 풀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는 일주일째 학교에 등교 중이었는데 우려했던 공황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첫 등교를 앞두고 잠시 긴장했지만 아빠와 함께 움직여서인지 긴장감은 높지 않았다.


석 달째 트라우마 상담치료에 능동적으로(?) 임하는 중이었으며 1년 만에 옮긴 병원의 처방전에도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언제나 방심하는 순간에 사달이 났다. 여지없이… 학교 문턱을 무난하게 넘어선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교실까지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위클래스 상담실에서 1시간 남짓 책을 읽다가 조퇴하기를 반복해 왔다.


그리고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한, 두 과목만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길어야 2교시를 마치고 하교하는 시험기간이 내게 유혹을 해오기 시작했다. 시험에 응시만 하면 조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미 생활기록부는 누더기가 된 지 오래, 수업일수만 채워서 유급이라도 면하자던 소박한 희망에 욕심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밀어붙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교실 출입을 두려워하는 아이를 위해 위클래스 상담실에서 따로 시험을 치도록 해주겠다던 학교의 검토가 무위로 끝나면서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교실에 발을 디딜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허황된 기대가 싹트기 시작했고, 아이는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혼자 교실에 들어가기 어려운 아이를 위해 입시 때부터 함께 학원에 다닌 친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른 아침 교문 앞에서 친구를 만나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를 보며 나는 또 흥분했고 역시나 방심했다. 두 시간 후에 아이를 데리러 올 생각으로 학교에서 5분 남짓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가하게 빈속을 채우러 두유를 사러 갔으니 말이다.


두유를 다 마시기도 전에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교실에 들어간 지 15분 만에 아이가 괴롭다는 문자를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선생님을 불러 달라는 S.O.S를 쳤다. 시험시간은 앞으로 30분은 더 남아 있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연락을 취하고 부랴부랴 학교로 향했다. 결국 아이는 7시 30분에 교실에 들어가 8시 10분에 교실 앞 복도에서 나의 부축을 받으며 하교했다.


공황발작 때 먹는 필요시약을 꺼내다가 손이 너무 떨려서 한 알을 흘리기까지 했던 아이는 차에 돌아와 남은 약을 먹고서도 한동안 진정하지 못했다. 학교에 돌아가기 전부터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상기했건만 그 순간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든 것 같아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다시 교실에 들어가기 위해선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불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이는 다행히 곧 진정이 되었고 오후에는 전망 좋은 카페에 들러 빙수와 커피를 마셨다. 후유증이 있긴 했지만 다음날 트라우마 상담치료에 가서 전날의 일을 복기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힘겨워했지만 상담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힘든 몸을 일으켰다. 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그렇게 내 마음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날은 13일 하고도 무려 금요일이었다.

이전 03화 무엇이 달라진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