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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Nov 06. 2023

영혼이 따라올 시간

시간에 관대하겠다던 결의는 어디로…?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성공한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이 시간을 지배한다면 그는 4차원을 넘나드는 자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이 세계에 사는 모든 존재는 당연히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간혹 시간을 관리한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몇몇 극도로 성실한 자들이 있지만 시간을 절약한다는 말도 어리석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당신이 오늘 잠을 설치며 절약한 두어 시간이 나중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시간을 앞지르려는 망상도, 시간을 낭비하는 오만도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다. 억울해도 소용없다. 20대부터 나의 좌우명이 되어버린 “우공이산”이라는 고사성어는 그런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를 이루려 조급해하지 말 것이되 주변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목표로 삼은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책상 앞에 이 글귀를 걸어놓고 시시때때로 쳐다보면서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실제로 시간은 나에게 너그럽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매몰차지도 않았다. 시간은 적당한 때에 소망한 것을 이루어주었지만 그 적당한 때라는 게 언제나 나의 기대보다 한참을 늦었다.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라 언제나 요행을 바랐지만 위대한 시간은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데 충분할 만큼 나를 기다리게 하였다.


휴직을 한 지 7개월이 넘었고 복직까지는 이제 5개월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우울증에 걸린 아이를 돌보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 휴직의 목적은 분명 이루었다. 아이는 아주 조금씩 좋아지다가 이제는 우울증의 증상보다 그 후유증을 치유하는 것에 더 치중할 만큼 정신적으로 건강해졌다. 불어난 체중을 정상으로 돌리고 떨어진 체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시급해졌는데 그 일 역시 만만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나는 다시 조급해졌다. 아이가 깊은 우울감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다행이라 여기던 게 몇 달 전이었는데 이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아이를 다시 정상인의 삶으로 되돌리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참으로 간사한 게 인간의 마음이다.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며 아이만 살리자는 심정이었는데 다시 모든 것을 일으켜 세우려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복직이 다가올수록 아이가 혼자만의 힘으로 일상을 소화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런 마음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얼마 전 오랜만에 법정스님의 강론을 유튜브로 보게 되었다. 불과 서너 해 전에 보았던 그 동영상이 한동안 잊고 지냈던 시간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소환해 주었다. 인간은 간사하며 아둔하기까지 한 것이 분명했다.


강론의 주 내용은 시간에 쫓기는 삶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가에 대한 것이었다. 속도와 효율성에 매몰된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였다. 이 강론이 내게 유독 인상 깊었던 이유는 스님께서 소개해 주신 서양의 탐험가 이야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한 탐험가가 원주민 세명을 짐꾼으로 고용해서는 삼일동안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목적지를 향해 돌진했다고 한다. 계획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짐꾼들을 몰아붙인 것인데 그렇게 말없이 길을 재촉하던 원주민들이 한순간 돌연 자리에 멈추고는 꼼짝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탐험가가 갖은 방법으로 회유해 봤지만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빨리 걸어왔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말이다.


탐험가는 어리석은 원주민이라고 그들을 한심하게 보았을지도 모를 이 이야기가 나에겐 큰 각성을 주고 말았다. 나 역시 영혼을 잃어버린 채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멀리 달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으니 말이다. 단 3일을 정신없이 달려도 영혼이 쫓아오지 못하는데 나는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인가? 내 영혼이 나를 따라오지 못한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려 7개월을 멈추었는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정확하게는 그 7개월조차 제대로 멈추지 못했다. 늘 무엇엔가 쫓기듯 조급하고 불안해했다. 가끔은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 분노했고 폭발했다.


나의 영혼은 이제 나에게 돌아올 길을 잃었거나 더 이상 그럴 마음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라는 인간은 영혼이 깃들기에 부적합해 보일만큼 불안정한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의 우울증이 나를 멈추게 했지만 그게 조금이라도 더 늦었다면 나는 영영 내 영혼이 돌아올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내 아이의 우울증 역시 지난 2년간 휘몰아친 입시생활로 뒤쳐져 버린 그 아이의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와 내 아이의 영혼을 기다리는 소중한 시간인 것도 모른 채 나는 간절하게 본전 생각만 해온 것이다.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쌓아올렸다한들 영혼이 털린 자가 어떻게 행복을 꿈꿀 수 있겠는가.


법정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랬다.

“행복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진정한 행복은 이다음 이뤄야 할 목표가 아니다. 지금 당장 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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