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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Nov 22. 2023

터널의 끝?

아이는 회복 중인데 아빠는 방전되다

아이의 우울증 투병이 1년을 넘기면서 상황이 사뭇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전문적인 트라우마 상담치료 때문인지 병원을 옮기면서 바뀐 약물처방 때문인지 그저 그럴 만큼 시간이 흐른 탓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의 전반적인 컨디션과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생활자세 모든 면에서 놀랍게 좋아졌다는 것이다. 아이는 급격하게 우울감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고 가족을 향한 날 선 반응도 현저하게 줄었으며, 가족과 일상을 함께 하는 횟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젠 애써 유도하지 않아도 제 발로 거실로 나와 가족과 어울리기도 한다.


우울증 환자와 살고 있는 가족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있겠는가? 모든 고뇌의 시간은 언제나 충분히 숙성되면 효과가 나타난다고 믿지만 우리의 믿음이 항상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아니면 충분한 숙성의 시간에 대한 견해가 다른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전환점을 지났다는 기대를 아주 조심스럽게 하고 있다. 아이는 정상적으로 수업에 참여하지 못해도 두 달 가까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등교하고 있다. 지난주 상담선생님께서는 아이가 등교에 대한 불안을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셨다.


선생님이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린 이유는 아이의 반응 때문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아침마다 등교하는 게 귀찮다고 답을 한 것이다. 등교를 싫어하는 건 모든 아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인데 아이는 두렵다고 하지 않고 귀찮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거다. 나는 웃음이 났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반가웠다. 이제 큰 고비 하나를 넘겼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이가 학교 가는 게 귀찮다고 말하는 걸 즐겁게 들어주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1년여의 칩거(?) 생활로 체중이 몰라보게 늘었고 그로 인해 무릎, 다리, 허리 등에 말썽이 났는데 아이는 스스로 조금씩 활동량을 늘리면서 체중을 줄여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울증 치료에서는 이 “스스로”라는 단어에 집중한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게 회복의 신호라는 것이다. 여전히 반복되는 일상에 힘겨워 하지만 그 일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미래를 꿈꾸고 있다. 이처럼 감사하고 행복한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아이의 변화에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그 사이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휴직으로 인해 수입이 현저히 줄었으니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약간의 대출을 감수해야 했다. 워낙 고금리 시대이기에 이자부담을 줄이고 여윳돈을 만들 생각에 집을 내놓고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계획했다.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아있는 동네를 떠난다는 것과 서울보다 좀 더 한적한 곳으로 나간다는 생각에 아이는 이사를 반겼다. 문제는 꽁꽁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가 발목을 잡았다. 시세 대비 최저가로 집을 내놓았지만 쉽게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가격을 후려치려는 사람들만 모여들었고 나는 괘씸하고 불쾌한 마음이 들면서 그럼에도 거래가 시급한 내 처지가 서글펐다.


마련해 둔 생활비는 점점 줄어갔고 나는 점점 예민해졌다. 예상대로 아내의 수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는데 내년 3월까지 보장된 휴직을 앞당겨 복직할 처지는 또 아니었다. 아이가 무사히 3학년으로 진학하여 학업에 적응하는 걸 한 달이라도 봐주어야 한다. 이 딜레마에서 나는 헤어 나오기 힘들었고 점점 지쳐갔다. 요즘은 아이가 나의 눈치를 살핀다. 자신을 보살피기 위해 아빠가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이의 눈치만 보며 일 년을 살았는데 아이가 내 눈치를 보니 나도 가끔씩 대놓고 화를 냈다. 그간에 쌓인 게 많았던 게다.


내 증상은 번아웃이었다. 가끔 새벽에 깨어 이명 같은 소리를 듣지만 일시적인 것 같다. 정신줄을 놓을 만큼 감당하기 힘든 건 아닌데 쌓이고 쌓인 피로감이 분출구를 찾고 있었다. 한결같이 굳건히 지켜주던 나의 존재가 아이에게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을 준 것은 분명한데 나에겐 그런 존재가 없었다. 아내는 아이도 나도 그리고 자신도 챙기지 못했다. 나도 어딘가에 기대고 싶었지만 나에겐 허락되지 않는 호사였다. 비빌 언덕이 없다는 게 이토록 서러운 것인 줄 몰랐다.


다음 주에는 고향에 묻히신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를 개장하고 다시 화장하여 서울 근교의 추모공원으로 모셔오기로 했다. 형들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일을 기어코 하게 되었고 나는 딱히 반대하지 못했다. 일 년에 두 번도 찾아가기 힘든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이와 하루먼저 내려가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고향땅을 보기로 했다. 아이 앞이라 참으려 하지만 주체할 수 없게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가까운 곳으로 모셔온다고 얼마나 더 찾아갈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좀 든든해 질지 모르겠다.


어두운 터널이 길수록 그 끝은 더욱 찬란하다. 그러나 그 찬란함이 반갑지만은 않은 게 가장 사고가 많은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감당 못하게 들이닥치는 빛으로 잠시 천지분간을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잠시 속도를 줄일 것이다. 그렇게 쨍하고 내리칠 빛을 숨죽이며 받아내야 한다. 쨍하고 해 뜰 날은 찰나의 영광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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