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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an 01. 2024

낮잠을 자다

과각성의 부작용, 뜬눈

아이는 아무리 피곤해도 낮에 잠을 자지 못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주요 증상 중 하나인 과각성 때문이라고 했다. 밤잠을 설치고 악몽에 시달린 다음 날엔 더했다. 낮잠을 자면 다시 악몽에 시달릴 거라는 걱정이 앞섰고 밤에도 쉽게 잠에 들기 어렵다는 불안감에 낮에는 누워 있어도 절대 잠에 들지 못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율신경계의 작동에 이상이 생겨 안전한 상태에서도 불안감을 제어하지 못해 과도한 각성상태를 유지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깨어있을 때엔 늘 이런 과각성 상태였고 그 피로감으로 인해 더 예민해지다가 급격한 우울감에 빠져 들곤 했다. 트라우마 상담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난해 8월부터 조금씩 좋아졌지만 낮잠을 자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아이가 2~3주 전부터 혼자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가 잠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깨어난 후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면서 더 예민해졌는데 얼마 전부터는 개운한 낮잠을 자게 되었다. 그리고 낮잠을 잔 날은 오히려 밤에도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


인간의 몸을 지배하는 자율신경계는 적당한 수준의 각성과 이완을 스스로 반복하게 되어 있는데 PTSD 환자들은 깨어있을 땐 과각성을 보이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과도하게 이완되는 해리(졸도, 기절) 증상을 보인다. 그랬던 아이에게 드디어 정상적인 자율신경계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아이는 여전히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고 가끔씩 늦은 오후에 주체할 수 없는 우울감을 호소한다. 이럴 땐 약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다른 활동을 통해 기분을 전환시키기도 한다. 이 점이 분명하게 달라진 것이다. 이젠 본인의 우울증상을 인지하고 이겨내려 무언가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이의 상태를 관찰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의 우울증이 완치된 것이 아니며 우울증은 높은 재발률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난치병이다. 그런데 내가 365일 24시간 아이를 관찰하고 보살필 수는 없다. 이제 아이가 자신의 병을 관리할 시기가 온 것이다. 아이는 지난 1년의 고된 투병기를 통해 그 힘을 갖게 되었다. 아직은 부족하겠지만 그 힘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더 강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역할은 여가까지다. 물론 앞으로도 아이를 지켜봐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은 없다. 그 몫이 아이에게 넘어갔다는 걸 나는 계묘년의 마지막 날에 분명히 알게 되었다.


12월 29일 겨울방학식이 있던 날 아이는 드디어 2학년 출석일수의 2/3를 넘겼다. 개학 후 5일의 수업일수가 남아있긴 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겨울방학 전에 3학년 진급을 위한 의무 출석일수를 채우려 발버둥을 쳤다. 그 발악이 독이 되었는지 나는 그날 오후부터 급격한 몸살에 시달렸다. 코로나19 감염 이후로 가장 극심한 증상이었다.


아이는 뻗어버린 아빠를 남겨두고 엄마와 운동을 하러 다녀왔고 저녁에는 도넛요리를 만들었다. 만든 음식을 옆 동에 사시는 할머니에게 직접 갖다 드리기도 했다. 다음날에도 아이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트라우마 상담치료를 다녀온 뒤 기름떡볶이를 만들었다. 통인시장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체증과 몸살에 시달리면서도 꽤 많은 양의 떡볶이를 흡입(?)해 주었다.


그리고 셋째 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마지막 날에도 나는 몸살에서 온전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이는 결국 오후 무렵에 잠들어 있는 내 곁에서 우울감에 빠져 힘겨워하다가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나는 조금 회복된 상태였고 아이에게 추가약을 복용시켰다. 잠시 실랑이가 있었지만 우리는 기분전환을 위해 온 가족이 광화문으로 향했다. 교보문고에 들러 새해 달력을 사고 광장마켓에서 간식을 먹었다. 한 시간 남짓만에 돌아왔지만 아이는 다시 살아나 있었고 온 가족이 함께 만두를 빚어 늦은 저녁을 해결했다.


나는 이때 비로소 깨달았다. 24시간 아이의 컨디션을 살피고 조금 안좋아 보일 때마다 무언가를 궁리하고 실행해야 했던 나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 아이의 상태를 묻고 해결방법을 함께 모색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선택하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예전과 같은 혼란과 시행착오는 없었다. 아이는 자신의 상태와 현실의 한계를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되었다.


여전히 우울증 약에 의존해야 하고 오랜 은둔생활로 몸이 말씀이 아니게 되었지만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이는 가족괴 소통하고 있으며 가능한 범위에서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는 시간의 몫이었다. 나와 아이는 시간에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서두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멈추지 않으면 미래는 우리의 편이다. 이것이 내가 쉰두 해를 살며 알게 된 유일한 삶의 지혜다.


이제 시간을 견디는 일만 남았다. 나의 몫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충분한 시간이 되어 좋아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떠랴. 우리는 동행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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