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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Dec 27. 2023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라는 망령

아직은 계묘년…

지난해 12월 26일의 악몽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다음 해에 또 사달이 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 연휴는 그렇게 평온했고 계획했던 일정을 차근차근 소화해 내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작년에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크리스마스까지는 말이다.


아이는 학교에 매일매일 가야 하는 일상, 독일어 과외, 실기수업의 공백 등 자신에게 처한 상황에 대해 체력적인 부담과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며 조금씩 힘겨워했지만 나름 슬기롭게 문제들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과거 무기력하게 우울감과 무력감으로 도피해 버렸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유는 분명했다. 나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마다 찾아오던 우울감과 밤의 수면장애가 다시 시작되는 듯했지만 아이는 크게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겨내는 중이었다. 독일어 과외를 잠시 놓으면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시작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아이는 아빠와 대안을 모색하는 쪽으로 긍정적인 심리상태를 유지했다. 나는 유학이나 미래의 꿈보다 시급한 건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 말했고 내년에도 마찬가지라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조급해할 필요가 없으며 시간은 우리의 편이라고 말이다.


아이는 매일 저녁의 메뉴를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고 엄마가 퇴근하기 전부터 미리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긴 했지만 요리에 재능이 있는 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스테이크, 파스타, 햄버거, 치킨베이크에서부터 부추전, 두부요리, 바싹 불고기, 미나리주꾸미무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메뉴가 저녁상에 올라왔다. 그렇게 아이는 우울과 불안을 스스로 이겨내고 있었다. 기특하고 대견하고 고마웠다.


다시 악몽의 12월 26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의식했지만 나는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1년의 시간이 아이를 이만큼이나 단단하게 해 주었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24일에는 아침 일찍 예약한 케이크를 픽업했고 오후에는 아이가 보고 싶어 하던 영화 “노량”을 관람했다. 저녁에는 근사한 아들의 성탄요리를 아내와 함께 감상했다.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귀가해준 딸아이 덕분에 온 가족이 성탄케이크 앞에서 새해의 꿈을 빌었다. 오랜만에 눈이 내린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분당으로 모셔온 할아버지 성묘를 다녀왔다. 눈이 얼어 가파른 경사로를 차로 이동하기 어려워 백 미터가량을 걸어 올라갔지만 마침 다행히 눈을 치워주셔서 무사히 성묘를 마쳤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브런치카페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다.


사람들은 근사한 요리 앞에서 기분이 좋아진다. 모처럼 딸아이와 아들이 런치세트요리를 셰어 하면서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 오랜만에 흐뭇했다. 이렇게 하루를 넘기면 걱정했던 12월 26일이 오더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겠구나 방심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나 그날은 아이가 유급을 면하기 위한 마지막 수업일수를 채우는 날이었다. 이날만 등교를 하면 남은 8일을 모두 결석하더라도 아이는 3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단 하루를 남기고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저녁에 간식으로 도넛을 시켜 먹은 아이가 속이 불편하다고 하더니 9시부터 심각한 구토증상이 찾아왔다. 자정까지 네 차례나 속을 게워내더니 급기야 아이는 기력을 잃었고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이의 심리상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단순한 배탈이나 급체에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는 믿지 못했다.


그렇게 12월 26일 0시 51분에 나는 아이와 구급차에 몸을 실었고 그로부터 6시간 동안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한 끝에 대학병원 응급실을 나왔다. 5개월 전 여름방학을 하루 앞두고 공황발작으로 응급실을 찾았던 때가 데자뷔처럼 반복되었다. 물론 증상은 달랐고 아이는 수액을 맞은 덕분인지 조금 회복이 되었을 뿐이다. 응급실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이 자리에서 복기하고 싶지는 않다.


결국 마지막 하루의 출석퍼즐을 채우는 일은 이틀 뒤로 미루어졌다. 언제나 이랬다. 우울증 투병은 돌발상황과 변수의 연속이다. 나도 이제 단련이 되었는지 대처가 빨라지긴 하였다. 어쨌든 아이는 우울증이 깊어지지 않았고 고달프긴 했지만 12월 26일을 큰 탈 없이 넘겼다. 아이가 한강을 찾았던 작년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상대적으로 가벼운 액땜을 했다고 생각한다.


계묘년을 이렇게 넘기면 못된 계모(?)는 가고 값진(?) 해가 찾아오려나? 부질없는 아재개그로 꿈이라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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