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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씀 Jul 27. 2024

채소를 못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변명이지

채소 못 먹는, 크론병 환자가 여기 있는데요...

"참나, 채소 못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먹기 싫어서 하는 변명이지"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을 때 떠난 외근이라 괴로운 마음에 눈을 감고 있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채소 논쟁에 눈이 번쩍 뜨이고 말았습니다. 무슨 대화인가 들어보니, 저희 팀 동료와 이번 일정을 함께 하게 된 '채식주의자'분과의 대화 소리였습니다. 채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이었습니다.



짧은 정적이 흐른 뒤, 제 동료는 "건강 문제로 채소를 잘 못 드시는 분도 있어요"라고 말했는데, 며칠 전 제가 채소를 못 먹는다고 한 것을 떠올리는 눈치였습니다. '채식주의자' 분께서는 단호하게 "그런 사람이 어딨냐. 변명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고요. 당사자였지만 외근가서 일할 체력도 부족한 때인지라, 저는 조용히 이어폰 음악소리를 높인 뒤 휴식을 취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동료가 살며시 찾아와 말하더군요. "다 들으신 것 같은데, 제가 괜한 소리를 해서 불편하실까봐요.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저는 정말 솔직하게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우연히 들은 대화 덕분에 누군가는 '채소 못 먹는 나를 꾀병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깨달았고, 병으로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면 안 되겠구나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저 또한 살면서 좁은 경험으로 얼마나 많은 판단을 했을까, 오히려 반성하기도 했고요.

 



저는 채소를 못 먹는 병이 있습니다.


크론병이라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는데요. 소화기관 어디라도 염증이 생길 수 있는 희귀난치병에 속하는 질환입니다. 저도 성인이 되어서 앓게 되어 이제 8년 차이지만, 아직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병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맹장 쪽이 아파서 맹장수술을 받았어요. 맹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수술 부위에서 장결핵 혹은 크론병이 의심된다며 한동안 추적관찰을 받았습니다. 희한하게 치료를 받고 있음에도 몸은 오히려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고심 끝에 대형 병원으로 옮겼고, 다시 수일에 거쳐 검사한 끝에 크론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진단을 받는 과정 자체도 쉽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장에 구멍이 생겨 기약없이 입원했던 일도 있었고요. 벌써 8년 전이네요.



크론병은 잘 알려지지 않은 질환이지만 가끔 매체에 나오곤 합니다. 유명 가수분이 크론병 환자이기도 하고, 크론병 환자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드라마도 뉴스에서 봤었고요. 병이 너무 힘든 크론병 환자가 범죄를 저지른단 내용의 드라마로 기억하는데요. 범죄와의 연관성은 도무지 모르겠으나, 지속되는 통증과 의식주의 '식'이 단절되는 건 분명 유쾌하지는 않은 일입니다.



소화기에 염증이 자꾸 생기는 병이라서일까요, 먹는 게 가장 문제였습니다. 일단 저는 섬유질이 많은 식재료는 다 먹지 못했고, 소화되는 재료보다 소화가 불가능한 재료가 더 많았습니다. 부드러워서 괜찮을 줄 알았던 바나나도, 소화기에 좋다던 양배추도, 당연히 고구마도 금지식품이었습니다. 염증이 많은 시기에는 조금만 먹어도 며칠 동안 배가 아프더라고요. 좀 과장해서 병이 심할 때는, 마트 채소 코너만 지나가도 배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달까요?



다른 크론병 환우분들도 저처럼 채소를 못 드시는지는 잘 모릅니다. 제 주치의 선생님께서도 환자마다 못 먹는 음식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며, 건강할 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조금씩 알아두라고 하셨거든요. 어쨌든 제게 채소는 무서운 식재료였습니다. 누구는 건강에 좋으라고 채소를 권장하는데, 크론병에 걸린 저는 건강하기 위해 오히려 채소를 피해야 한다니. 참 웃기죠.



몸에 있는 염증은 약으로 치료하면 되니 어렵지 않았습니다. 교수님이 시킨대로 먹고 치료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음식은 정말 끊임없는 고민과 도전이더라고요. 크론병에 걸리고 하나씩 음식을 도전할 때는 정말 제가 '독버섯 먹을까봐 걱정하는 원시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하나 먹을 때마다 아플 수도 있다는 각오와 걱정을 안고 먹어야 했거든요.



채식주의자들이 외식하기 힘들다는 걸 본 적이 있는데요. 비슷하게 채소 못 먹는 사람도 외식하기 어려웠어요. 어느 식당을 가도 채소와 고기가 함께 나와요. 예를 들면요. 콩나물 국밥을 먹으러 가서 콩나물을 걷어내면 남은 국물과 밥이 얼마나 옹졸한지 몰라요. 고기를 걷어내도 먹을 게 없지만, 채소를 걷어내도 먹을 게 없는 현실이 정말 아이러니했습니다.



한창 몸이 안 좋을 때는 채소를 쳐다만 봐도 아픈 것 같았는데요. 차츰 몸이 좋아지면서 신기하게도 채소가 먹고싶어지더라고요. 조금씩 도전해서 지금은 꽤 많은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먹거리를 신경쓰고 스트레스도 관리하면서 통증도 많이 사라졌고요.



올해 진행한 내시경 검사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염증이 없다는 행복한 결과도 받았어요. 완전히 나았다고 할 수 없는 미지의 병이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으니까요. 요즘은 (푹 익힌)콩나물도 먹고, 고구마도 먹고, 비빔밥도 먹으며 행복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고사리는 겁나고 옥수수는 먹으면 100% 아프지만, 무엇을 먹으면 괜찮고 무엇을 먹으면 아픈지 안다는 게 든든히 안심이 되더라고요.




병이라는 건 당연히 당사자도 힘들지만,
주변도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크론병이 100%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지금보다는 갈등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가족과의 갈등이 많았고 사회생활하는데 좋지 못한 시선을 받기도 했어요.



진단 전에는 잦은 복통으로 화장실을 자주 갔고 조퇴도 많이 했는데요. 나중에 진단을 받은 제게 꾀병인 줄 알았다며 미안했다고 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당시 저는 주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보니 그제서야 알게 되었는데,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더군요. 그동안 제 이미지가 어땠을지 상상하기도 싫더라고요.



아마 예전의 저보다도 채소가 먹기 힘들고, 저보다도 힘든 생활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채소가 먹기 어려운 그분들이 존중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식재료 알러지가 있는 분들도, 채식을 원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이고요.



앞으로 저는 크론병과 음식에 관한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크론병을 얻은 뒤 도전하고, 아파했고, 성공했던 음식의 기록과 조리법을 모아보려고 해요. 특히 크론병 환우 분들이나 소화가 힘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본 글은 브런치북의 프롤로그에 속합니다. 제가 겪은 크론병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브런치북은 매주 월요일 연재 예정입니다. 편하게 다음 이야기를 받아보기를 원하신다면 본 브런치북/작가 구독을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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